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요즘 힘이 든다. 목요일이 더 그렇다. 무엇보다 육체적 피곤을 많이 느낀다. 월요일은 한 주의 출발이기에 긴장감으로 시작하고 화요일은 굳었던 몸이 풀려 슬슬 속도가 붙는다. 수요일은 조금만 더 잘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앞으로만 달린다. 목요일이 되면 몸에 반응이 나타난다. 시원한 그늘이, 편안한 의자가 생각난다. 

언제부턴가 목요일 아침 화장은 일부러 붉은 립스틱을 바른다. 볼터치까지 끝낸 얼굴에 화룡점정 붉은 립스틱으로 마무리 한다. 그러면 어쩐지 힘이 나는 것 같다. 몸도 마음도 지친 나를 위한 처방이기도 하지만 나의 밝은 기운이 다른 이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출근을 하면 창구로 나가 고객들과 인사를 나눈다. 배에 힘을 주고 한층 더 높은 톤으로 대화를 한다.

"안녕하세요? 요즘 날씨가 더워서 어떻게 지내셨어요?"
처음에는 순전히 지친 나를 위한 연기에 가깝다.
"지점장은 더워서 어째 지냈노?"
"요새는 더워서 일도 못하고 경로당에 나가 늘 논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기분이 좋아지고 위로를 받는다. 그러다 보면 긴 목요일이 지나간다.
얼마 전 명예퇴직을 한다는 후배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지점장 승진도 했고 그만둔다는 내색도 없었기에 모두들 놀랐다. '왜''어디 아프냐''사고 쳤냐' 밴드 공간에서 난리가 났다. 후배 답이 오히려 담담했다. 55세가 되면 그만둘 거라고 늘 생각해 왔단다.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쉽지 않은 결단을 내린 후배가 멋있어 보였다. 이제 편안하겠다 싶어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한때 그랬다. 여자 나이 55세면 할머니 소리 들을 텐데, 그때까지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잠깐 명예퇴직을 고민하기도 했다. 퇴직금을 받아 편히 살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너무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사람마다 타고난 몫이 있고 나이에 맞는 역할과 직책이 있다. 돈보다 소중한 가치를 선택해 남들의 귀감이 되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나도 여생은 좀 더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존경받는 삶을 살고 싶다.

오늘은 비 오는 목요일이다. 비 탓으로 기분이 더 쳐져 있다. 지점 문이 열리니 내 기분과 상관없이 고객들이 몰려온다.
"지점장님, 수고하십니다!"
첫 손님으로 오신 이장님의 유쾌한 목소리에 내 기분까지 올라간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구수한 가요가 흘러나온다. '남자라는 이유로~' 음악 소리에 지점 안이 들썩인다. 어디 좋은 곳으로 나들이라도 가시는 모양이다. 문을 나서며 커다란 미소를 지으며 직원들에게 인사한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

입이 올라가고 눈썹이 올라갈 정도로 밝게 웃으시는 어르신께 오늘도 삶을 배운다. 젊은 고객의 과하게 붉은 입술을 보며 '저분도 목요일에 자신을 위한 처방을 한 건가?' 혼자 생각하며 미소 짓는다. 창문 너머 보이는 꽃 파는 아줌마의 분주한 손놀림이 기운차다. 오늘은 진홍의 장미 한 다발을 사서 창구에 꽂아야겠다. 목요일이 사랑스러워진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 나이도 목요일쯤 되었다. 지치기도 하지만 이제야 제대로 된 삶을 아는 나이다. 월·화·수요일까지 성장을 향해 달려왔지만 이제 성숙을 알아갈 나이다. 지친 나를 위해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남에게 위로도 해줄 수 있는 아주 적당한 나이다. 목요일을 견디다 보면 금요일이 온다. 금요일은 내일 쉰다는 희망이 있기에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동료들과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시며 미뤄 두었던 영화 한편 볼 수 있는 날이다. 토요일은 전원을 가꾸고 여행을 하며 가족들에게 맛있는 요리도 해줄 수 있다. 일요일은 조용히 사색하며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다.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퇴직하니 더 바쁘고 힘이 든단다. 요일 개념도 없어지고 휴일 경계도 없단다. 무슨 일을 하든 어느 자리에 있든 삶은 똑 같단다. 오늘 내가 있는 그 자리가 최고의 자리란다. 문득 힘들다 생각될 때 붉은 립스틱을 발라보자. 목요일이 사랑스러워 진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