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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3년 27세 나이로 통신사 서장관에 임명된 신숙주는 7개의 외국어에 능통했다. 뿐만 아니라 탁월한 외교 감각과 폭넓은 지식, 교양으로 그는 세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세종의 명을 받들어 교린(交隣)정책 차 일본으로 떠난 신숙주는 9개월 동안 일본을 돌아본 후 1471년 <해동제국기>를 기술했다.

당시 그는 영의정의 자리에 있었다. <해동제국기>는 조선에서 잊혀졌지만 그 세밀함과 정확함으로 16세기 일본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그는 대일 외교 방향에 대해 임금에게 이렇게 고했다.

"그들은 습성이 굳세고 사나우며 칼과 창을 능숙하게 쓰고 배 부리기에도 익숙합니다. 우리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들을 진무(鎭撫 : 어루만져 달램)하기를 법도에 맞게 하면 예를 갖추어 조빙(朝聘)하지만, 법도에 어긋나게 하면 곧 방자하게 노략질을 합니다…(중략)…이적(夷狄)을 대하는 방책은 외정(外征)에 있지 않고 내치에 있으며, 변어 (邊禦 : 변방을 지킴)에 있지 않고 조정(朝廷 : 올바른 정무)에 있으며, 전쟁에 있지 않고 기강(紀綱)을 진작하는 데에 있습니다"

신숙주의 간언은 한마디로 조선이 이웃 국가로부터 안보를 도모하려면 내실과 법치에 따른 기강과 함께 선린(善隣)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숙주는 임종하기 직전에도 성종(成宗 1469~1494)에게 일본과의 화평(和平)을 잃지 말 것을 간언했다.

탁월한 외교 천재 신숙주의 이러한 진언은 머지않아 사실이 됐다.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은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중국의 저명한 명(明)·청(靑)史 및 조선史 연구자인 기시모토미오(岸本美緖)는 임진왜란의 원인으로 조선과 일본 간의 교역단절과 동아시아 신흥 상업 질서의 충돌을 주장해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그에 의하면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의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는 명(明)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교역질서가 해체되고 과열하는 상업의 붐 속에서 신흥의 상업 군사세력이 급속히 신장하여 생존을 걸고 충돌하는 시기'였다는 것. 

조선과의 교역권을 잡는 세력이 결국 명과의 교역권도 확보해 지배 세력이 된다는 의미였다. 당시 조선은 사대(事大)에만 빠져 신숙주의 교린(交隣)을 잊고 일본을 하대해 문을 닫고 있었다. 그 결과 조선은 일본의 상인들과 결합한 막부와 다이묘들을 궁지에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외교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적과 동지의 관계 설정에 조선은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은 그 결과였다.

지난 11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은 한일·일한협력위원회 합동총회에 '한일관계를 위해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취지의 서면 메시지를 보냈다. 

서면에서 문 대통령은 "식민지 시대는 한일 모두에게 아픈 과거다. 그러나 아프다고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며 "국이 역지사지의 자세로 정의와 원칙을 바로 세운다면 마음을 터놓는 진정한 친구가 될 것"이며 "동북아의 번영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여 온 일본의 건설적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 것으로 청와대는 발표했다.

결국 문 대통령의 주장은 이번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의 문제도 일본이 책임지고 풀어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물론 이에 대한 일본 외무성의 반응은 한마디로 '우려와 노력'이었지만, 아베 총리는 좀 더 다른 수를 내다보고 있는 듯하다. 아베 총리는 이보다 앞선 11월 10일 "남북 및 미북 정상 간 소통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김정은 위원장과 (자신이) 직접 만나 제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틀어진 한일관계에서 북한이 새로운 변수로 떠오른 것이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 적과 동지의 구분에 실패한다면, 일본도 대한민국에 대해 그렇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쓸데없는 반일감정이 대한민국만 고립시키고 있다. 500년 전 신숙주의 혜안이 담긴 <해동제국기>를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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