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바위의 눈물
꽃바위의 눈물
  • 울산신문
  • 승인 2018.12.1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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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원 수필가

울산에 뿌리를 내린 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동네 버스 정류장에 있으면 '꽃바위 花岩'행 버스가 수시로 왔다가 떠나가곤 했다. 산마을에서 출발해 도심을 지나 바다까지 가는 노선이었다. 회색빛 공업도시에서 '꽃바위'라는 지명을 만날 때마다 콘크리트 벽 사이를 비집고 피어난 민들레 보듯 마음이 화사해졌다.

401번 버스를 타고 꽃바위까지 간 날은 늦가을 오전이었다. 긴 방파제를 따라 가니 거대한 덩치를 가진 등대가 보이고 더 이상 길은 보이지 않았다. 꽃바위는 어디쯤 있을까? 짐작으로 찾아왔지만 이름답지 않게 어수선한 느낌의 공장들만 보였다. 꽃바위는 이름만 남아 있을 뿐, 어디에도 없었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항만을 축조하고 바다를 매립하는 바람에 꽃바위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검회색 바위에 꽃문양 무늬가 하얗게 박혀 있다고 해 '꽃바위'라고 불렀다 한다. 해가 떠오를 무렵, 만조를 이루었을 때 바위에 박힌 꽃무늬가 물결에 드리워져 더없이 아름다웠다. 해질녘 썰물 때면 온갖 바위가 만물상을 이루어 이를 보고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절경을 시인 묵객들은 화암만조(花岩晩潮)라 부르며 방어진 12경 중 제1경으로 꼽았다.

화암추등대 앞 긴 방파제 위에서 바다를 보았다. 방파제 아래 테트라포드가 보였다. 거센 풍랑에도 끄떡없을 것 같은 시멘트 덩이는 볼 적마다 무서워 발을 올릴 엄두도 나지 않는데 그 위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평일 오전에 한가로이 낚싯대를 드리운 장년들은 어쩌면 비정한 세월을 낚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바다는 가을 햇살에 은빛 보석을 쏟아 부은 듯 찬란했다. 등대 근처에는 크고 작은 크레인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1,600톤급 '골리앗 크레인'에 눈길이 머물렀다.

골리앗 크레인은 일명 '말뫼의 눈물'로도 불린다. 현대중공업이 2002년 사들인 대형 크레인의 별명이기도 하다. 스웨덴 말뫼 지역에 있던 조선업체 코쿰스가 문을 닫으면서 내놓은 것으로 '코쿰스 크레인'이라고도 한다. 당시 현대중공업은 해체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코쿰스 크레인을 1달러에 사들여 울산으로 가져왔다.

코쿰스 크레인이 '말뫼의 눈물'로 불리게 된 것은 울산으로 옮길 때 말뫼 시민들 반응 때문이다. 당시 수많은 시민들이 항구에 나와 크레인 해체와 운반을 지켜봤으며 스웨덴 국영방송은 장송곡과 함께 '말뫼가 울었다'는 내용의 뉴스를 보도했다. 20세기 초 스웨덴은 세계 조선업계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던 코쿰스의 파산과 크레인 이동은 세계 조선산업의 중심이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후 '말뫼의 눈물'은 조선업계 몰락을 상징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코쿰스 크레인이 고향을 떠나 꽃바위에서 새 삶을 꾸린 지 십 수 년이 흘렀다. 고향 말뫼에 있을 때보다 힘도 더 세지고 일도 열심히 했다. 그러나 조선업계 불황으로 골리앗 크레인은 더 이상 힘을 쓸 수가 없게 됐다. 크레인은 이곳으로 올 때 새로운 희망을 품고 왔을 것이다. 이국만리 머나먼 곳에 정착했으나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크레인은 어쩌면 또다시 자리를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 사라진 꽃바위 위에서 조선산업의 꽃을 찬란하게 피우던 시절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려는가.      

방파제 둑에 서서 꽃바위가 어디쯤 있었을까 짐작해 보지만 알 길이 없었다. 아까부터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아저씨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꽃바위가 어디에 있었는지 아시냐고. 바로 아래 테트라포드에 깔려 있을 거라고 했다. 내가 서 있는 아래에 꽃바위가 있었다는 말이다. 산업화 꽃을 피우기 위해 기꺼이 수장됐다. '화암만조'가 사라진 자리에는 한때 조선산업의 꽃이 만개했었다. '세상사 화무십일홍'이라지만 산업의 꽃마저 지는 세월이었다.

꽃바위가 이곳이라고 알려준 그는 선박회사에서 25년간 일을 했다고 했다.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니 아마도 명예퇴직을 한 것 같았다. 아직 고3인 자녀가 있다며 쓸쓸하게 웃었다. 지금은 퀵 서비스 일을 한다는데 일거리가 별로 없어 이곳에 바람을 쐬러 나왔다고 했다. 먼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금세 사위가 캄캄해졌다. 은빛으로 눈부시던 바다도 그새 낯빛을 바꾸었다. 비라도 쏟아질 기세였다. 나를 꽃바위 버스정류장에 내려주고 휑하니 사라져 간 그의 뒷모습이 눈에 자꾸 밟혔다. 또다시 산업의 꽃이 활짝 필 수 있도록 꽃바위가 마법이라도 부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버스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지금은 하늘이 갤 때를,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