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농성
굴뚝농성
  • 김진영
  • 승인 2018.12.26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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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편집이사 겸 국장

크리스마스인 지난 25일 성탄의 메시지를 뒤로 한채 '굴뚝 농성 세계 신기록'이라는 우울한 뉴스가 전파를 탔다. 고용 승계와 단체협약 이행 등을 요구하며 서울 양천구 75m 높이 굴뚝에 오른 파인텍 근로자들의 고공농성이 409일을 맞으면서다. 앞서 같은 회사의 다른 근로자가 2015년 경북 구미에서 세웠던 408일의 기록을 다시 넘긴 것이다. 하루가 더 지났으니 이제 410일째로 매일 신기록 행진이다.

파인텍의 모기업인 스타플렉스는 2010년 한국합섬을 인수하며 고용 승계 등을 약속해놓고 돌연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직원들을 정리해고 했다. 이에 반발해 2014년 차광호 지회장의 굴뚝농성이 시작됐고, 408일의 고공농성 기록에 부담을 느낀 사측이 노조와 합의를 이뤄내면서 농성이 끝났다. 그러나 8개월만에 사측이 단체협약 수용을 거부하고 다시 공장 가동을 중단하자 지난해 11월 다시 굴뚝 농성을 시작하게 됐다. 파인텍 공동행동은 "굴뚝에서 농성 중인 근로자들이 고공 생활과 극심한 추위로 몸과 마음의 건강이 심각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굴뚝 농성하면 울산은 거의 원조격이다. 하지만 사실은 굴뚝농성의 원조는 평양이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 오른 여성 노동자가 있다. 1930년대 당시 평양은 산업도시였다. 많은 농촌 청년들이 평양에 몰려와 고무공장과 섬유공장 등에서 일했다. 잘나가던 시절이 지나자 대공황이 닥쳤다. 그 여파로 공장에서는 단축 근무에 점심도 주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동료를 따라 새내기 파업단 교육을 처음 듣게 된 스무살의 강주룡은 파업에 가담했다. 급기야 평양 고무공장 공장주들이 임금을 내리기로 결의하자 강주룡은 공장의 횡포를 알리겠다며 을밀대에 올랐다. 강주룡의 을밀대 기와지붕 고공 투쟁은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고공농성이 됐다. 강주룡의 목숨 건 싸움 덕분에 고무공장 사장들은 임금 삭감을 철회했다.

가장 최근의 고동 투쟁은 지난 2013년 현대차 비정규직 사태의 상징이던 비정규직 2명의 장기 고공농성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울산의 고공농성은 골리앗 투쟁을 빼고 이야기 하기 어렵다. 1990년 4월 28일 새벽 3시 45분. 경찰은 이른바 '미포만 작전'을 개시했다. 현대중공업을 향해 경찰 대병력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동하는 경찰병력에 현대자동차 노조원들이 화염병을 던지고 지게차로 쇳덩이를 옮겨 경찰의 현대중공업 진입을 저지하기도 했다.

그날 오전 6시 정각 페퍼포그가 앞을 식별할 수 없도록 최루탄이 쏟아지는 속에서 73개 중대 1만여 명의 경찰 병력이 불도저를 앞세워 현대중공업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하늘에서는 헬기가 선무방송을 하고 바다에서는 군함을 통해 미포만으로 진입했다. 이에 저항하던 근로자들은 상당수가 연행을 당했지만 골리앗 결사대 78명은 골리앗을 점거한 채 투쟁을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골리앗 농성은 울산지역 근로자들과 가족들까지 가세해 연일 대규모 가두 시위로 이어졌고 노동운동의 전환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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