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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말

민병도

너무 멀리 왔나 허공에 놓인 사다리
내 다시 길을 잃고 마른 땀에 젖는 것은
함부로 나무의 말을 흘려들은 까닭이다

해와 달과 비와 바람 품고 때로 받들어서
그 어떤 서책에도 싣지 않은 초록 행간,
철따라 밑줄을 긋고 소리 낮춰 읽었던

나무인들 웃자라는 생각 하나 없었으랴
칼바람 천둥을 재운 나무 아래 살면서도
선채로 천리를 읽는 묵언설법 놓친 죄다

△민병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슬픔의 상류『들풀』『원효』 『바람의 길』외. 한국문학상, 중앙시조대상, 가람시조문학상, 금복문화상, 외솔시조문학상 등 수상. 현재 국제시조협회 이사장.
 

이서원 시인
이서원 시인

보이지 않는 깊은 존재의 침묵에 응답하는 시인이라는 숙명 앞에서 자연과의 교감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작가의 집 '목언예원'의 당호는 평생을 두고 '나무의 말'(木言)에 귀 기울이겠다는 자신만의 맹세는 아니었는지 위의 시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함부로 흘려들었던 나무의 경전과도 같은 말씀들을 뒤로 한 채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며 다시금 성찰의 계기로 삼는 묵언설법, 그것은 어쩌면 '선채로 천리를 읽는' 마음의 울림이 없으면 결코 속인은 알아들을 수 없다.


'해와 달과 비와 바람'이 함께하는 천지의 만물이 흐름에 의탁할 때 우린 얼마나 동화되고 유화하며 지내왔을까. 그 어떤 서책에도 없는 초록의 행간을 보아내고 그 깊이에 한껏 취할 수 있는 안목의 시력(詩力)이야말로 감각적 근원의 가치를 올바르게 보아내는 시력(視力)이라고 믿고 싶다.
어찌 나무라고 웃자라고 싶은 마음 없었을까. 웃자란다는 사전적 의미는 가지가 보통 이상으로 길고 연하게 자란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여기서 읽히는 시적 이미지는 가보지 않은 길의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우리의 삶과도 다름 아니다. 모든 물상(物象)은 어긋남의 돌출적 도발 또는 도전적 행위를 하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자신만의 한 울타리 안에서 그 어떤 유혹과 흔들림에도 올곧게 스스로를 다그치며 칼끝과도 같은 정신을 스스로에게 겨누었던 저 나무의 필법이야말로 시인이 지향하는 정신의 세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자와도 같은 나무에게서 배우는 성찰은 우리 모두에게 육안으로 보이는 그 너머의 말씀임에 분명하다.


내밀한 서정에 몰입하다보면 덤으로 얻어지는 장자의 말 이청득심(以聽得心)이 어찌 허투루 다가오겠는가. 오늘날 현대인들은 경청(敬聽)의 마음을 잊고 자기만의 목소리 올리기에 급급하다. 소통은 얼마나 잘 들어주느냐에 따라서 대화가 오가는 것이다. 나무의 작은 말 한마디에도 귀를 기울이는 시인의 겸허와 겸양 그리고 물아일체의 미덕에서 시는 이 봄날에 돋아나는 손톱만한 새잎처럼 아름답다. 그래서 시는 환희고 거듭남의 전율인 것이다. 이서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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