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박산성 역사공원 지정 환영한다
기박산성 역사공원 지정 환영한다
  • 울산신문
  • 승인 2019.07.09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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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울산 의병 주둔지이자 격전지였던 기령 소공원을 '기박산성 의병 역사공원'(가칭)으로 변경하는 안이 확정됐다는 소식이다. 역사공원 변경이 확정됨에 따라 울산 북구는 관내 우포석보, 우가봉수대, 신흥사, 기박산성 등 임진왜란 관련 유적지를 하나로 묶어 역사 및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역사 벨트화' 사업에도 탄력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다. 

북구에 따르면 지난달 20일 울산시 도시계획위원회가 매곡동 838-31번지 일원에 위치한 기령 소공원을 역사공원으로 변경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소공원이 역사공원으로 유형이 바뀌면서, 앞으로는 전체 면적에 대해 시설물을 설치할 수 있어 기박산성 의병을 추모할 수 있는 각종 기반시설 등을 마련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게 됐다. 또 '임란 역사상 최초의 의병'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시점에서 역사적 가치를 제고시킬 수 있는 사업들을 연속성 있게 진행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관련 북구는 7월부터 12월까지 2,000만 원을 들여 '기박산성 의병 역사공원'(가칭)조성계획에 대한 실시설계용역을 시행한다. 더불어 7월 중 의병 후손, 기박산성 임란 의병 추모사업회, 문화원 관계자, 주민 등으로 구성된 추진 자문단을 구성해 역사공원 내 들어가는 기념비, 조형물, 역사공원에 대한 조경 등에 대한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다. 

북구는 지금껏 관내 부족했던 역사 인프라를 구축하는 사업인 만큼 총 50억 원의 사업비가 대거 투입될 예정이기 때문에 관련 예산 확보가 관건이라고 밝히고 있다. 해당 사업은 1단계와 2단계로 나눠 진행될 예정인데, 우선적으로 구비 3억 원, 시비 17억 원 등 20억 원을 들여 기념비, 제단, 전시관 및 공원 조성을 2020년 공사 착공·완료할 예정이며, 이후 30억 원을 들여 전시관 전망대를 설치할 계획이다. 

북구 관계자는 "1단계 사업은 내년 3월 당초 예산을 통해 확보에 매진할 예정이지만, 2단계 사업에 필요한 30억 원에 대한 예산은 전액 국비로 진행될 계획에 있어 언제 확보될지 미지수"라면서 "북구 역사 벨트화 사업에 있어 기박산성 역사공원 조성은 중요한 사업 중 하나다. 앞서 문화재청장이 북구 내 임진왜관 관련 유적지를 방문했을 때도 이와 관련해 충분히 당위성을 설명했으며,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임을 밝혔으므로 지속적으로 예산 확보에 힘쓸 것"이라고 전했다. 

앞서 지난달 14일 이동권 북구청장은 북구를 찾은 정재숙 문화재청장에게 "유포석보, 우가봉수대, 신흥사, 기박산성을 역사벨트화하면 훌륭한 역사문화자원이 될 수 있다"며 문화재청의 관심과 예산 지원을 부탁했다. 또 신흥사 삼존불좌상과 복장유물의 국가지정 문화재 지정도 요청했다. 이명훈 기박산성 임란 의병 추모사업회 연구위원(고려대 명예교수)는 "기박산성 의병 이경연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썼던 '제월당실기(霽月堂實紀)'에는 1592년 4월 23일 울산 기박산성에 제단을 설치해 의병의 출진을 하늘에 알렸다는 내용이 나온다"면서 "같은 달 24일 조선왕족실록에는 곽재우 장군이 전국에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고 돼 있는데, 비교해보면 기박산성 의병 결진이 곽재우보다 하루 앞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하루 앞선 의병 봉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지역의 귀중한 역사적 사실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 묻혀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실 울산은 의병의 고장이다. 울산을 충의의 고장으로 만든 주역인 울산의병이 재조명되어야 할 시점에 온 셈이다. 

임진왜란 당시 벼슬아치들이 달아나기에 급급할 때 울산의 선조들은 서슴없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왜군 20여만 명이 조선을 침략해왔다.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동래성이 위태롭자 울산 병영성에 있던 경상좌병사 이각과 울산군수 이언함은 동래성으로 달려갔다. 전투를 하기 전에 이각은 달아났고, 이언함은 왜군에게 붙잡혔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백성들과 함께 장렬하게 산화했다. 이각은 병영성에 돌아와 재물을 빼돌리고, 첩을 도피시킨 뒤에 또 달아났다. 

4월 17일경 울산읍성과 병영성은 차례로 무너졌다. 울산의병들이 분연히 일어섰다. 4월 23일 기박산성에 1,000여 명이 결집했다. 인근 고을의 의병과 함께 5월 10일의 병영성 기습공격을 시작으로 공암(북구 신명 공암마을)전투와 유포, 달현, 전천, 개운포와 경주의 개곡, 모화, 영지, 노곡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멀리는 영천과 안동전투에도 참가해 용맹을 떨쳤다.

전쟁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울산을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78명을 선무원종공신으로 책봉했다. 충의사가 지어져 임란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지역의 의병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그들이 왜 분연히 일어서 어떻게 목숨을 받쳤는지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곽재우로 대표되는 의병의 역사를 좇았을 뿐 지역의 의병사는 소외됐다. 

이제 울산의 의병사를 재조명하고 이를 역사의 분명한 사실로 알려야 한다. 지역의 자긍심과 올바른 역사의 기록을 위해 나설 시점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