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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작은 것이라 되뇌는 순간 대략 서너 가지가 필자 뇌리에 '반짝' 스쳐 지나간다. 앞의 둘은 책이고 나머지는 몽당연필과 농소3동 도서관 등이다.

가장 먼저는 독일 태생 영국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가 1973년에 출간한 저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다. 실천적 경제학, 환경운동 등에 생을 투신했던 그는 이 책을 통해 인간 중심의 경제를 주창했는데, 그 고갱이는, 아무리 물질적 풍요가 약속된 경제 성장지상주의라도 그 추진과정에서 환경과 인간성이 파괴된다면, 인류에겐 백해무익할 뿐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 가능한 대안으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자율적으로 조절·통제 가능한 정도의 작은 경제를 유지할 때만이 그 근본 바탕인 자연 환경과 인간 행복이 공존할 수 있는 경제 시스템이 확보될 수 있단다. 따라서 단위가 작은 지역 노동과 작은 규모의 작업장, 더 작은 소유만이 인간다운 삶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의 지속을 보장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는 한평생 물레를 돌리며 마을 단위의 경제활동을 주장하고 실천한 인도 독립운동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의 철학과도 상통한다. 간디는 사실 거대 규모의 경제, 대량생산 대량소비라는 물신주의의 몰인격적 흉포한 폭력성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인간이 통제 가능한 사회조직과 경제규모 즉 작은 사회를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 어디서나 손수 물레를 돌려 자신의 옷감을 마련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지난 1982년, 주한 일본대사 스노베 료조의 초청, 제의로 일본 외무성 국제문화교류기금으로 출간된,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다. 이 책에는 일본이 '대大 자'를 지향하는 순간 파멸을 맞는다고 경고한다.

몇 날이고 끊임없는 칼질 가위질로 만들어낸, 아담한 정원과 방을 꾸미고 장식하고 있는 분재, 다다미방에 꿇어앉아 정해둔 절차대로 차를 마시는 다도(茶道), 소매 속에 그림을 넣고 다닐 수 있게 고안된, 그림을 그려 넣은 쥘부채, 워크맨, 트랜지스터 라디오, 손바닥 계산기, 둘둘 말아서 휴대할 수 있는 두루마리 그림 이야기 에마키(繪卷), 애니메이션과 작고 귀여운 인형, 일본 옛날이야기의 잇슨보시(一寸法師), 대나무에서 나온 엄지손가락만 한 가구야히메, 현대의 삼단 우산 등 이들은 모두 '축소'의 천재 일본인들이 최고 강점인 그 섬세함이나 집중력을 발휘한 결과로서의 훌륭한 문화유산이요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들이 최고의 강점인 '축소지향'에서 발휘되던 그것이 정반대인 '확대' 쪽을 지향하게 되면 '바보와 망상자'로 전락한다고 이어령 교수는 꼬집는다. 그 증거로 역사 속,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무력침공을 감행한 조선은 그 뒤로도 300년 가까이 지속됐지만, 그 자신은 몇 년 못 가 망해 버렸고, 근대에 와서도 대한제국을 침탈하고 중국 대륙과 만주까지 총칼로 유린하고 세계를 전화로 몰아넣었지만 결국 원폭세례를 맞지 않았냐 반문한다.

그랬음에도 그 역사를 외면하고, 지금 일본은 아베라는 정치인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은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 되기에 광분하고 있다. 이웃인 우리를 정치와 경제라는 총알, 폭탄보다 더 무서운 무기로 마구 침탈한다.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안타깝다.

몽당연필도 참으로 보잘것없고 작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 주변의 가장 아름다운 난쟁이 중 하나로 '몽당연필'을 늘 생각하곤 한다. 문득 70년대 소설,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그 첫 도입부 영수의 독백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난장이였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는 것 하나만 옳았다' 

여기서 사람들의 시선은 아버지의 외양 즉 눈앞에 즉시적으로 드러난 것만 보는, 대중 집단의 지극히 1차원적이고 외모지상주의의 폭력적 속물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가 얼마나 착하고, 얼마나 성실하게 노력하고, 얼마나 많이 자기 아내와 지식들을 사랑하는지는 결코 보려고 하지 않는다.

몽당연필 또한 또 다른 난쟁이다. 쓸모를 다한 그를 쓰레기통에 미련 없이 던진다. 그러나 그도 처음에는 아름다운 컬러, 늘씬한 외모였다. 필통 속에서 주목받는 생이었다. 아무도 그가 이룩한 사랑의 편지와 그의 밥그릇이 된 시험 답안지를, 그 빛나던 때를, 기억해주지 않는다. 황혼에 들어, 느리고 아둔해진 걸음걸이의 그들도 한때는 오월의 장미 같았던 뺨, 별처럼 빛나던 눈빛 지녔던 존재였음을 결단코 생각하지 않는다.

끝으로 몇 달 전 바꾼 스마트 폰에 옮겨놓은 도서관 앱 리브로피아를 열고 책을 검색하려고 농소3동 도서관을 들어가려니 폰 화면에 도서관이 보이지 않았다. 입구를 못 찾고 헤매다 결국 8월 어느 금요일 오후, 퇴근길에 직접 동네 농소3동 도서관을 들렀다. 사서분께 상황을 호소하고 폰을 보이니 맨 위 도서관 그림을 눌러주었다. 순간 그렇게 애태우던 입구가 거짓말처럼 열린다. 순간 이런 사소한 것도 해결되는구나. 이 모두가 작은 도서관이니까 가능한 것이라 생각하니 새삼스레 작은 것들이 정말 아름답다는 게 실감 났다. 

농소3동 도서관은 아주 작고 아담하다. 그러나 늘 사람들로 복작복작한다. 특히 이 도서관의 동쪽 벽에는 세상 가장 온화한 표정의 일가족이 산다. 얼굴의 한 부분이 아예 없어도 너무 완벽한 미소로 포근하게 웃음 짓는 가족이. 그래서 필자는 집 부근 농소3동 작은 도서관을 좋아한다. 그곳을 정말 사랑한다. 일 때문에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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