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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감염병으로 두 달 넘게 개학이 미루어지면서 백수 아닌 백수 생활을 하고 있다. 한동안 '집콕'을 하다가 '확찐자'가 되어가는 것 같아 울산대공원을 걷기로 했다. 

공원이 멀지 않은 데도 일 년에 가는 날이 손꼽을 정도였는데, 이젠 출근하는 남편 차를 타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 4, 50분 정도 공원을 걷는 것이 주요 일과이다. 보통 정문에서 시작해 남문을 지나 장미원과 윗갈티못을 거쳐 유실수원을 돌아 나오거나, 왼편으로 다리를 지나 메타세쿼이아 길을 거쳐 동문을 돌아 나오는 길이 산책 코스이다. 풀잎에 이슬이 맺혀있는 길을 걷다 보면 돌아올 땐 등으로 따뜻하게 햇살이 퍼진다. 덕분에 올해는 이른 봄부터 지금까지 공원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봄은 역시 꽃으로 시작한다. 3월 초의 제법 쌀쌀한 바람 속에서 먼저 작고 여린 풀꽃이 고개를 내민다. 윗갈티못 볕이 잘 드는 풀밭에 봄까치꽃, 광대나물, 민들레, 봄맞이꽃이 피기 시작하자 무스카리도 작은 포도송이 같은 꽃대를 내밀었다. 동문 쪽엔 목련꽃이 하얀 등처럼 내걸리고 3월 말경엔 드디어 산책길 양편의 벚꽃이 피었다. 벚꽃이 피었다 지는 동안은 거의 매일 공원에 갔다. 마침 날도 화창해서 파란 봄 하늘 아래 하얀 꽃들이 꽃 자체에서 빛이 나는 것처럼 눈부셨다. 

벚꽃의 절정은 오히려 질 때가 아닌가 한다. 눈이 내리는 것처럼 하늘하늘 진 꽃들이 바람에 쓸려 무더기무더기 꽃 무덤을 이루다가 문득 사라져 버린다. 보도블록 위에 떨어진 벚꽃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서 꽃의 살이 압화처럼 바닥에 붙었다. 가는 봄이 아쉬워 바닥이 꽃잎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 하지만 몇 차례 비에 그마저 사라졌다.

그리고 동백꽃. 요즘은 화려하게 개량된 동백이 많아서 단순한 홑동백은 오히려 보기 드문 편인데 동문 쪽에서 몇 그루 발견했다. 붉은 꽃잎에 샛노란 화심이 산뜻하다. 내가 산책을 시작할 땐 이미 지고 있었는데, 동백꽃이 진 자리는 붉은 카펫을 깔아놓은 듯 그대로 커다란 화판이다. 누군가 떨어진 꽃잎을 하나씩 주워 모아 하트 모양을 만들어 두었다. 또 누군가는 그것을 사진에 담는다. 봄이 주는 또 다른 풍경이다. 홑동백이 지니까 윗갈티못 근처의 겹동백이 피기 시작했다. 이 겹동백은 꽃이 크고, 화려하고, 많이 달려서 붉은 등이 잔뜩 켜진 크리스마스트리 같다. 더구나 무궁화처럼 피고 지고 또 피어, 거의 두 달 가까이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꽃산딸나무꽃이다. 남문 근처, 그러니까 SK광장으로 꺾어지는 잔디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나무에 걸린 이름 때문에 유심히 보게 되었다. 꽃사과나 꽃산수국처럼 '꽃'자가 들어가는 꽃은 더 화사하고 예쁘다. 이 꽃도 처음엔 옅은 미색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눈부신 하얀 색으로 변하여 깜짝 놀랐다. 아름답지 않은 꽃이 어디 있을까마는 꽃산딸나무꽃은 특히 더 아름답다. 찬란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아침에 이 나무를 지날 때마다 살아있다는 것이 기쁘고 두근거린다. 놀라운 사실은 꽃잎처럼 보이는 부분이 꽃이 아니라 꽃을 감싸는 포엽이라는 것. 수국처럼 실제 꽃은 가운데 연두색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분이다. 벌이나 나비를 부르기 위해서인데, 그래서인지 꽃산딸나무 부근에서 우아한 산제비나비를 발견하고 감탄하기도 했다. 이 나무는 단풍도 멋지다 하니 가을 산책길이 기대가 된다. 아, 마당 있는 집에 살게 된다면 꽃산딸나무를 심고 나비를 불러 모으리. 나무 아래 의자를 놓고 아침마다 오래 앉아 있으리.

대공원의 봄은 꽃으로만 오는 게 아니다. 동문 가는 길에 공원 지킴이처럼 늠름히 서 있는 돌하르방은 일찌감치 짚으로 된 모자와 외투를 벗었다. 윗갈티못의 붕어들은 더 자주 수면 근처로 와서 부산을 떨고, 물비늘은 더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새소리는 짝을 부르는 듯 유난히 높고 명랑하다. 며칠 전엔 관리사무소 쪽을 지나다 줄기 가운데 불에 탄 흔적이 있는 소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아마 벼락을 맞은 것 같다. 원래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행운을 가져온다고 하여 도장을 만들어 몸에 지녔다. 벼락 맞은 소나무는 어떨까? 불의 담금질과 시련을 견뎠으니 역시 행운을 가져오지 않을까? 나무는 상처에 아랑곳없이 봄물이 올라 굳세게 푸르렀다. 저 꿋꿋한 소나무처럼 감염병의 어려움을 헤쳐나가길 빌어본다.

요즘 대공원은 초여름 향기를 풍기며 나무들이 연두에서 녹색으로 건너가는 중이다. 꽃은 꽃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싱그럽고 아름답다. 오늘 비가 왔으니 이제 꽃산딸나무는 남은 꽃잎을 하르륵 떨구겠다. 벚나무는 작은 버찌가 다닥다닥 열려 붉어질 것이고, 주변 산은 초록이 더 번질 것이다. 이른 더위에 어쩌면 수련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지도 모르겠다. 내일의 산책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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