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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용이 춤을 춘다. 한가위 보름달 아래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에 터를 잡고 하늘과 땅 바람과 하나 되는 춤사위를 풀어 헤친다. 세계인이 처용의 춤사위에 어깨를 덩실댄다. 낭보다. 개운포 바닷가에서 시작된 천년의 춤사위가 이제 세계무형유산으로 올랐다. 우리는 이미 종묘제례 와 종묘제례악, 판소리, 강릉단오제라는 세계가 인정하는 무형의 문화유산을 가진 나라다. 이제 처용무와 함께 모두 8건의 세계무형유산을 가졌으니 한류의 힘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울산 사람들에게 처용무는 처용과 함께 울산을 대표하는 하나의 문화코드다. 그래서 이번 유네스코의 결정에 대한 감도가 남다르다. 말 많고 탈 많은 '처용논쟁' 속에 처용은 언제나 자신의 본질에 충실해달라고 무언의 주문을 했다. 그 본질은 천년의 세월에 녹아 있는 우리 문화의 힘이다. 용의 아들이 '龍'을 버리고 '容'을 택한 이유는 변화의 코드를 읽을 줄 아는 포용의 힘이자 여유의 자세다. 포용의 힘이 여유와 만나 펼치는 춤사위는 우주와 천지를 하나로 연결한다. 그 연결의 고리가 수용에 있다는 사실을 처용은 이미 천 년 전에 읽고 있었다.


 흔히 우리 문화사에서 탈의 등장을 조선조 양반사회의 붕괴 이후로 이야기 한다. 남사당과  탈춤, 마당놀이를 한국 민중문화로 읽는 사람들은 판소리를 양반 문화의 전유물로 구분한다. 그들의 주장을 옮기면 우리네 서민, 즉 백성들은 양반네가 대청마루에서 소리꾼을 불러 판소리와 춤사위를 격식 있게 향유하는 현장을 담장 너머에서 귀동냥했다. 이 같은 격식의 문화코드는 구중궁궐로 들어가 한껏 치장하고 뽐을 내 궁중음악의 분을 바르고 비단과 장식으로 '인테리어'를 마친 뒤 왕족과 귀족 앞에 새로운 양식으로 선보였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이미 천 년 전 울산 개운포 갯가에서 동해 용왕의 아들이 하늘과 통하는 춤을 췄고, 그 춤사위의 여유와 포용을 탈바가지로 형상화해 신라 사람들과 고려 사람들이 두둥실 어깨춤으로 세월을 거슬렀다. 물론 지금의 처용무는 조선조에 와서 일정한 틀을 갖췄다고 하지만 그 정신의 원형은 개운포에 있고 그 포구를 통해 세계와 소통하던 사람들의 정신에 있다. 출발 자체가 정신의 밑그림을 깔고 있기에 처용무는 민중보다 궁중의 의례무로 자리했고 흥보다 장엄함이 어깨선을 타고 발끝까지 전율하는 신비로 자리했다.


 그 신비로운 전율의 형상화가 처용의 모습으로 이어졌다. 처용의 형상이 기록으로 나타난 것은 조선조에 만든 악학궤범이다. 악학궤범에는 그림과 함께 처용의 모습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수명이 장수할 넓은 이마, 산 모양 비슷한 긴 눈썹, 애인을 바라 보는듯한 너그러운 눈, 바람이 잔뜩 불어 우그러진 귀, 복사꽃같이 붉은 얼굴과 진기한 향내 맡아 우묵해진 코 등등. 평범하지 않은 형상을 근거로 이방인으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처용은 우리 선조가 만든 정신의 실존물이다. 그 실존의 형상화 과정에서 천년 세월의 변화의 코드가 박혀 있고 세월의 무게를 덧칠했다.
 모르긴 해도 처용이 아내의 불륜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불륜의 현장을 살육의 피비린내로 바꿔버렸다면 피 냄새가 사라진 순간 처용도 사라졌다. 처용이 목격한 불륜이 다리가 네 개인 욕정이든 이방의 다양한 문화이든 그 상징의 원형은 불분명하다. 다만 원형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바로 본질이다. 신라인들이 지향했던 세계관은 나와 우리를 넘어 다른 것에 대한 수용에 있었고 그 수용의 뿌리가 포용과 어울림을 흡입해 처용이라는 나무로 드러난 셈이다.


 놀랍게도 천년 전 처용을 통해 드러낸 다양성의 수용이 오늘의 세계화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화는 다양성에 대한 수용없이는 무의미하다. 하지만 그 수용의 코드는 반드시 극복의 연결 장치가 조건이다. 극복의 과정이 생략된 수용은 수용이 아니라 혼란의 불씨에 불과하다. 역신을 수용하는 과정에 겪었을 처용의 혼란이 완만하고 장엄한 춤사위로 드러난 것은 다양성을 수용하는 관용과 여유이자 극복의 표현이다.
 울산은 등재를 앞둔 반구대암각화와 등재가 결정된 처용무라는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도시가 됐다. 단순하게 두 개의 문화유산을 가진 도시이기에 세계적인 문화도시가 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구대암각화에 새겨진 선사인의 도전과 기상이 수천 년 뒤 새로운 세계를 품고 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려는 정신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는 바로 현실의 다양한 문제를 내면화해 극복의 코드로 변용하는 힘이 울산의 정신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그 극복의 코드에 울산의 미래가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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