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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초입, 유난히 햇살 맑은 주말이 엉덩이를 가만두지 않는다. 신발끈만 당긴 채 나선 언양장은 역시나 왁자했다. 인보에서 현미찹쌀 1말을 이고나와 좌판을 벌이는 할머니부터 울산 인근 5일장을 순례하는 우리옷장사치 아저씨까지 앉으면 그들의 삶과 그들이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장터국밥 가마솥에 피어오른 김처럼 솔솔했다. 몇주전 남창장을 찾았을 때 느꼈던 일목요연함은 없었지만 언양장은 여전히 울산의 대표 장터라 할 만큼 장날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살아 있는 전통의 현장이었다.


 최근 전국의 지자체들이 로드문화를 개발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강원도다. 강원도는 공장이 적고 물적인프라가 척박한 탓에 관광산업을 '강원도의 힘'으로 부각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강원도가 단순하게 설악산이나 오대산, 스키장이나 해수욕장 등 자연자원에 기대어 관광산업을 특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강원도는 이미 수년전부터 '로드문화 개발'이라는 프로젝트를 가동했고 그 대표적인 콘텐츠로 신라장군 이사부길과 장터길 등을 특화했다. 일본관광성은 지난해 이미 농촌관광 분야를 미래관광산업의 동력으로 삼아 각 농촌마다 전통적인 먹거리와 이야기를 개발하고 있다.


 울산의 경우 언양장과 남창장 등 8곳에서 전통장이 열리고 있다. 이 가운데 언양장과 남창장의 경우 울산 서부권과 남부권의 생활주기를 닷새마다 장날에 맞출 만큼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어온 장날은 장터마다 줄잡아 500~ 600여명의 이동장사치와  4,000~5,000여명의 손님들이 몰려와 새로운 장터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울주군에서는 이 가운데 남창장을 옹기마을, 진하해수욕장 등과 연계한 관광축으로 집중 개발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문제는 관광축의 지정과 개발이 아니라 내용이다. 관광의 심장이 테마형 관광지라면 혈맥이 살아 꿈틀거리는 핏줄은 길이다. 길이 죽고 없는 곳에 테마형 관광개발만 집중투자한다면 그야말로 속빈강정에 불과한 관광개발이 되고 만다. 강원도의 경우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의 결과 마지막 동학군의 체취를 따라가는 동학의 길, 한말 의병의 길과 격전루트, 정철의 관동팔경 길, 정약용의 곡운구곡 탐방길 등 스토리텔링의 자원을 찾아내 이를 담론화하고 있다.


 한국방송공사가 기획한 '차마고도'가 세계인들에게 호평을 받은 것은 그 길 위에 티벳 남동부 차와룽의 마지막 마방 자시송부의 이야기가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길은 사람이 있다. 현존하는 마지막 마방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원시의 습지 미주리강을 거슬러 올라간 루이스와 크라크는 과거의 탐험가이지만 미국인 여행자들은 여전히 그들의 탐험로를 따라 미주리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잉카와 마야의 후예들이 그 선조의 길을 잊고 있지만 세계의 여행자들은 그들의 문명을 쫓아 제국의 우물과 제단, 농경지와 성지를 찾아 길을 걷고 있다.


 문화가 밥이라는 이야기는 오래된 담론이다. 나라를 잃고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시대, 백범은 '나의 소원'에서 문화를 조선인의 미래로 예견했다. 문화로 꽃피우는 나라, 그 나라는 창칼로 번영하는 나라보다 더 힘 있고 오래갈 것이라는 백범의 선견지명은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의 결과였다. 문화는 우리의 일상이지만 일상이 아닌 것이다. 먹고 마시고 노는 모두가 문화이지만, 그것이 아닌 것이 문화라는 이야기다. 그 모호함의 경계가 바로 상상력이다. 문화가 상상력을 유전인자로 갖고 있기에 문화는 우리에게 미래라는 말이다.


 돌이켜보면 울산은 지난 한 해 동안 산업수도라는 이미지를 벗고 문화를 도시브랜드화하려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실제로 울산시의 이같은 노력은 가시적 성과를 내고 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울산이 산업수도이자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대한민국의 '오래된 미래'이기 위해서는 앞으로의 과제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울산의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역사적 증거물은 물론, 여전히 우리가 이어가고 있는 오래고 친숙한 문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는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일이다. 그 연결의 단서들은 무수히 많다.


 헌강왕이 울산에 나들이 왔다가 처용을 만난 개운포 길, 갈문왕이 사랑하는 왕비를 못잊어 추억을 되새기던 천전리 가는 길, 포은이 어음리 귀양터에서 머리를 식히러 찾았던 대곡천 가는 길. 이 뿐 아니다. 박상진 광복군 총사령관이 서울로 떠나던 길과 외솔 선생이 한글연구에 사색하던 병영동네 길은 물론 언양장터를 향하던 두서 인보 은편 길천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도 있다. 바로 이 길에 상상력을 입히면 울산의 옛길은 오늘 다시 살아나 내일을 함께 여는 역사와 문화의 길로 열린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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