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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옥희 전 교육감의 갑작스런 별세로 치러진 울산교육감 보궐선거에서 남편인 천창수씨가 당선됐다. 

 노 전 교육감의 교육철학을 계승하겠다며 선거에 나섰고, 결국 유지를 이어가게 됐다. 

 서울대학교 사범대를 졸업했지만 유신독재 반대 운동을 하다 20년 동안 교사 임용을 받지 못했던 그는 노동운동을 하던 시절, 고 노옥희 전 교육감을 만나 사랑을 싹 틔웠다. 

 천창수 울산교육감의 그간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편집자 

천창수 울산시교육감 당선인이 6일 울산 남구 자신의 선거사무소에서 꽃목걸이를 목에 걸고 환호하고 있다. 유은경기자 2006sajin@
천창수 울산시교육감 당선인이 6일 울산 남구 자신의 선거사무소에서 꽃목걸이를 목에 걸고 환호하고 있다. 유은경기자 2006sajin@

천창수 울산교육감은 1958년 11월 20일, 경남 김해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1919년 생인 아버지는 김해에서 농사를 지은 전형적인 가난한 농부였다. 

 김해 합성초등학교를 졸업했고 마지막 중학교 입학시험 세대로 김해중학교 합격 통지를 받은 며칠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973년, 부산고등학교에 합격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를 부흥시켰다고 믿어 대한민국 경제를 이끄는 최고의 경제학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졌던 박정희키즈였다.  

 육영수 여사 피살에 일본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해 친구들과 함께 교문을 막는 선생님을 밀어내고 학교에서 가까운 일본영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기도 했다.

 1976년, 서울대학교 사범대에 입학했다. 공장을 다니기 위해 서울로 몰려드는 어린 친구들이 많았고 학교 근처 신림동에도 달동네가 형성됐다. 

 영어교사를 맡아 1주일에 3일 이상은 야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1주일에 하루는 야학에서 잠을 잤다. 

 공동 화장실 앞에 줄을 서고 물지게를 지고 달동네를 올라와야 했지만 함께 공부하던 아이들과 친구처럼 지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978년, 박정희가 99.8%의 득표로 9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던 해, 10월 유신 기념일에 맞춰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광화문에서 배포하다 체포됐다. 

 고문을 당하고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아 영등포구치소 독방에 수감됐다. 

1981년 1월 노동 동지에서 시작해 인생 반려자가 된 고 노옥희 전 울산교육감과 천창수 신임 울산교육감의 민중혼례식 모습. 천창수 울산교육감 제공
1981년 1월 노동 동지에서 시작해 인생 반려자가 된 고 노옥희 전 울산교육감과 천창수 신임 울산교육감의 민중혼례식 모습. 천창수 울산교육감 제공

 

 학교에서는 제명 처분을 받았다.

 1980년, 유신정권이 무너지고 3월 복학을 하고 1982년, 졸업을 했지만 교직 발령이 나지 않았다. 

 사범대 졸업생 가운데 발령이 나지 않았던 4명은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위반, 전두환 정권의 5·17 계엄령 위반 전력이 있는 졸업생이었다. 

 서울시교육청에 한 달 동안 항의를 했지만 알아낸 것은 안기부에서 발령을 금지시켰다는 것 뿐이었다. 

 사립학교나 일반 기업 취업도 할 수 없었다. 신문에서 직업훈련원 모집공고를 보고 정수직업훈련원 전기과에 원서를 내고 합격했다. 

고 노옥희 전 울산교육감과 천창수 신임 울산교육감이 십리태숲을 찾아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모습. 천창수 울산교육감 제공
고 노옥희 전 울산교육감과 천창수 신임 울산교육감이 십리태숲을 찾아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모습. 천창수 울산교육감 제공

 

 1983년,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훈련원 추천으로 현대중전기에 입사를 했다. 전기 기능 실력을 인정받아 직장에 순조롭게 적응을 했다. 

 동료들과도 잘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현장의 노동환경은 열악했고 동료들과 현장문제 해결을 고민하는 소모임을 만들었다.

 1984년, 손목이 잘리는 대형 산재를 당하고도 보상을 받지 못한 제자의 사건을 계기로 졸업생들의 노동실태 조사를 하던 노옥희 교사를 만났다. 조사에 도움을 주면서 가까워졌고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함께 토론했다.

 1988년,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임금협상과 단체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서 파업이 길어졌고 해고를 당했다.

 1989년, 노옥희와 결혼했고, 신문배달 등으로 어렵게 생활했지만 노옥희는 한 번도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2002년, 20년 만에 교사 발령을 받았다. 서울 신림고에 1년 근무를 하고, 다음 해에 가족이 있는 울산으로 전출을 왔다. 

지난 2022년 6월 1일 고 노옥희 울산교육감 후보가 당선이 확실시되자 남편 천창수 신임 울산교육감과 함께 꽃다발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울산신문 자료사진
지난 2022년 6월 1일 고 노옥희 울산교육감 후보가 당선이 확실시되자 남편 천창수 신임 울산교육감과 함께 꽃다발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울산신문 자료사진

 이후 19년 동안 평교사로 아이들 곁에 머물렀다.

 수업을 할 때는 '질문이 꽃 피는 교실'을 꿈꿨다. 

 어떤 질문도 소중하게 여겼다. 

 시간이 걸렸지만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질문을 하게 되었고, 언제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교사로 인정해 주었다.

 수업을 하고 나면 빠지지 않고 수업일지를 썼다. 

 19년 동안 1만 2,000회가 넘는다. 

 수업시간 아이들의 반응을 알아야 더 나은 수업을 할 수 있고 아이들을 한 명 한명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학교 밖에서도 아이들을 만났다. 

 2009년부터 2020년까지 청소년 독서모임 '날개'와 역사기행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했다. 

 독서모임은 스스로 커리큘럼을 기획하는 자율적인 모임이 되도록 했다. 

 경쟁할 필요가 없어 서로의 성장을 도와주며 우정을 쌓는 자리였다.

 학생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교사들의 성장을 위해서는 동료 교사들 사이의 협력과 소통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동료교사들과 만든 독서모임과 연구모임은 지금까지도 지속하고 있다.

 대안모색을 위한 연구활동에도 힘썼다. 

 북유럽교육복지연구회를 활동을 하면서 교육 선진국의 교육거버넌스, 학교공간, 교육과정, 교육복지, 교육법제, 유네스코와 OECD가 전망하는 미래교육 등을 연구했다. 

 교육현장 경험을 접목시켜 우리 교육이 어떻게 변화해 가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이어왔다.

 퇴임 후에도 여러 어려움에 놓인 학생들을 지역사회가 함께 지원하는 '교육복지이음단' 활동을 하면서 학습 능력이 부족한 느린 학습자를 돕기 위해 핀란드 교육과정을 활용하는 등 교육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지혁기자 uskjh@

청창수 울산교육감 약력
청창수 울산교육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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