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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장세련
삽화 장세련

정축년 봄은 유난히 일찍 찾아왔다. 소백산 꼭대기의 잔설이 녹는가 싶더니 산 아래부터 진달래가 붉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불타는 듯한 진달래꽃은 금세 산자락을 타고 올라갔다. 사월이 되자 국망봉을 비롯한 소백산 능선에는 철쭉이 장관을 이루었다. 여느 해와 다르게 붉은 꽃이 산자락을 흘러내릴 듯 넘쳐 났다. 사람들은 꽃을 보면서도 혀를 끌끌 찼다.

 "꽃은 저렇게 예쁘게 피는구먼."

 일찍 찾아온 봄과 함께 여름도 일찍 찾아왔다. 마구령 자락은 초록 물이 뚝뚝 떨어질 듯 싱그러웠다. 산천은 푸르러도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마음 한구석에 뭔가 편치 않은 일이 분명 있는데 대놓고 말을 하지 못했다.

 "말세가 되어 그런가? 새 세상이 오려고 하는가? 산천초목은 세상 돌아가는 꼴을 지켜보고 있는가?"

 유교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하는 나라에서 신하가 군주를 벌하는 이신벌군의 대역죄가 일어났다. 충신들은 모두 참살당하고 간교한 무리들이 세상을 움켜쥐고 있었다. 의를 바로 세우려 일어났던 충신들의 의거도 사전에 발각되어 무위로 돌아갔다. 하늘은 무심하기만 했다. 분연히 일어나려 했던 충신들은 저잣거리에서 사지가 찢기었다. 놀란 사람들은 모두가 입을 닫고 말았다. 

 끝까지 신하의 도리를 지키고자했던 금성대군은 모태의 고향인 순흥부로 위리안치 되었다. 대군의 분기가 하늘을 찔러서인가 순흥을 감싸듯 안고 있는 백두대간의 소백산 능선에 산천초목도 분연히 들고 일어나는 듯했다. 

 그해 여름이었다. 한 무리의 사내들이 소백산 자락의 마구령으로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사내들은 마구령 초입의 주막집으로 몰려 들어갔다. 마당에는 장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마당 가운데 평상에서 탁주 사발을 들이켜고 있는 패들이 있는가 하면 일부는 주막집에서 장거리로 이어지는 한길을 목이 빠져라 내다보았다.

 "이 양반은 뭘 한다고 안 오는 거야. 장터 국밥집 주모랑 한판 붙었나?"

 "예끼 이 사람. 말이라고 내뱉기만 하면 다 말인 줄 아는가. 이선달이 그렇게 허접한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그건 모르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했으니까."

 "이선달이 오면 자네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해 주겠네. 어디 한 번 이선달의 발길질에 채여 보게나."

 "아니, 사람 잡을 일이 있나. 사나이가 고자질이라니."

 "이선달의 발길질에 채여 저승 구경 가기 싫거든 말조심하게."

 "어이쿠.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저기 나타났네."

 장꾼들은 일제히 한 길 쪽을 바라보았다. 길 한가운데 부지런히 걸어오는 사내가 있다. 키는 다섯 자 반이나 될까 하는 아담한 키에 몸집도 가냘파 보이는 사내였다. 인물도 그저 평범한 시골 사내로 보이는 게 어디에 내놓아도 눈에 띄는 사내가 아니다. 사내는 등에 아담한 봇짐을 지고 있었다. 걸음걸이가 가벼운 걸 보아 짐이 무거워 보이지 않았다.

 "자 이제 이선달이 왔으니 슬슬 일어나 보세.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고개를 넘어야 하지 않겠나."

 장꾼 중에 나이가 제일 많은 장 노인이 먼저 평상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탁주를 마시고 있던 패들도 서둘러 잔을 물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벗어 놓았던 자기봇짐을 찾아 둘러메었다. 이선달은 주막집에 나타나자 연장자인 장 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소인이 볼일이 있어 좀 늦었구먼요."

 "됐네. 서둘러 출발하세. 시장하면 탁주라도 한 잔 마실텐가?"

 "아닙니다. 그냥 물이나 한 사발 마시지요."

 이선달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주모가 바가지에 냉수를 한가득 담아내왔다. 주모는 서른다섯으로 이선달보다 일곱 살 위였다. 주모는 이선달에게 '동상 동상'하고 살갑게 불렀다. 그러나 이선달은 한 번도 누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몸에 착 달라붙을 듯한 주모의 눈길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주모는 풍기 사람으로 일찌감치 시집을 가서 딸 하나를 낳았다. 한창 깨가 쏟아질 혼인 삼 년 만에 서방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청상과부가 된 주모는 먹고살기 위해 이곳 마구령 초입에 주막을 차렸다. 주막에는 장날마다 고개를 넘는 장꾼들로 미어터졌다. 파장이 늦어져 고개를 넘지 못하는 장꾼들은 주막에서 잠을 자고 새벽같이 마구령을 넘어갔다. 손님이 많다 보니 손에 물기 마를 날이 없었다. 그녀를 돕는 건 올해 열다섯 살의 딸 윤미 혼자였다. (수요일 계속됩니다) 김태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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