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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장세련
삽화. ⓒ장세련

"스승님 절부터 받으십시오."

 "이 사람아.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어서 일어나게."

 이선달이 바닥에서 일어나자 박상교가 끌어안았다. 원산에서 헤어지고 나서 칠 년 만의 만남이었다. 이선달은 얼굴 주름이 한층 깊어진 스승의 모습을 보고 짠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방법이 없어 연락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 아니었겠나. 자네야말로 어떻게 지냈나? 그리고 안동 땅엔 무슨 일인가?" 

 이선달은 한동안 한솥밥을 먹었던 사람들과 뜨거운 재회의 인사를 나누었다. 일행 중에는 새로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다. 차력을 하는 형제가 새로 들어왔는데 형은 돌을 입으로 씹어서 부수고 동생은 배 위에 돌을 올려놓고 해머로 내려쳐 부수었다. 잘 다듬으면 무예로도 한몫해낼 것 같았다. 공중 그네타기를 하는 소희는 벌써 중년 여인 티가 났다. 헤어질 때 나이가 열네 살이었었다. 이선달을 오빠라 부르며 살갑게 굴던 아이였다. 소희는 이선달의 품에 뛰어들기라도 할 것 같았는데 데면데면했다. 남사당패에서 소희가 묘기를 부릴 때면 항상 손을 잡아주던 남자와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낳고 있었다. 세월이 그만큼 흘렀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선달은 남사당패를 떠나 온 뒤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 예전보다는 넓은 세상에 나온 것 같기는 한데 하루 한 시간이 불안한 날의 연속이었다. 지금의 생활보다는 남사당에서 외줄 타기를 할 때가 훨씬 즐거웠었다. 더 돌이켜보면 미인폭포에서 스님에게 택견을 배울 때가 더 행복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떤가? 지금 하는 일은 잘 되어 가고 있는가? 출세하고도 우리를 모른 체 하면 안 되지."

 이선달은 자신이 지금 출세를 한 것인지 아니지 분간을 할 수도 없었다. 생각대로 일이 잘 풀려나가기만 한다면 세상을 호령할 만한 위치에 가 닿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확실한 보장이 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판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갈수록 태산입니다. 이 길이 산 넘어 또 산입니다."

 "그러겠지. 우리도 예전만 못하다네. 함길도에는 이징옥 장군이 사라진 뒤에는 여진족의 행패가 날로 심해지고 있다네. 그래서 올해는 아예 방향을 틀어 내륙으로 들어가기로 했다네."

 "그렇군요. 나흘 후에 순흥 장인데 날을 맞추어 한 번 들리시지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네. 의성 예천을 거쳐 순흥에 가려고 했었지."

 "순흥은 대처라 꼭 장날이 아니어도 놀이판을 벌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더 좋지. 자네가 그곳에 좋은 자리를 알아 놓겠나."

 "그러지요."

 이선달은 남사당패와 작별을 한 뒤 안동을 벗어났다. 부지런히 걸어 북후까지 가서 주막에 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안동을 떠날 때부터 뭔가 석연찮은 기분에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산길에 들어서고부터는 구체적으로 뒷골이 당기기 시작했다.

 "어서들 올라오시게."

 이선달이 막 고갯마루에 올라섰을 때였다. 한 떼의 건달들이 길을 막고 섰다. 이선달은 앞에서 버티고 서 있는 건달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바로 안동장에서 미투리를 팔던 자였다. 미투리를 살 때부터 장꾼이 아니라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한명청이란 이름을 들이대 본 것이었다.

 "어서 오시게. 오늘 제삿날이 될 줄은 알고 올라오셨겠지? 감히 우리 나리 욕을 하다니."

 상대는 미투리 장사 말고도 일곱 명이었다. 모두 장터에서 보았던 눈에 익은 얼굴들이었다. 이미 서너 놈은 장도를 뽑아 들고 있었다. 이선달은 혼자 상대해도 되지만 언양 무사들의 실력도 볼 겸 뒤로 물러났다.

 "네놈들도 모조리 저 아래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보내주마. 권혜민이라는 자가 저 아래 땅속에서 네놈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순식간에 여남은 명이 한데 엉켜 칼부림이 시작되었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산 공기를 찢었다. 숫자만 믿고 달려든 미투리 장수는 단 한 합을 막아내지 못하고 목동맥이 잘리고 말았다. 목줄기에서 분수 같은 핏줄기가 솟구쳤다. 그 모양을 본 다른 놈들도 움칠했다. 너무 상대를 만만히 보았다는 자책감이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언양 무사들이 번개처럼 달려들어 한 놈씩 저승길로 보냈다. 단 세 합을 버텨낸 놈이 하나도 없었다. 여덟 명의 시체가 장작을 포개놓은 듯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여덟 명이 흘린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와 산길을 붉게 물들였다. 

 "어서 치우고 갑시다."

 언양 무사들은 칼도 뽑지 않고 지켜보고 명령만 내리고 있는 이선달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 같이 치우도록 합시다."

 이선달은 쓰러져 있는 미투리 장수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자 언양 무사 한 사람이 달려들어 시신의 팔을 들고 번쩍 들어 올렸다. 같이 절벽 끝으로 들고 간 뒤 아래로 훌쩍 던져버렸다. 순식간에 여덟 구의 시체를 절벽 아래로 던져버리고 바닥에 흐른 피는 대충 흙으로 덮어 버렸다.

 "내려가서 덮어야 할까요?"

 "그냥 놓아두고 갑시다. 어차피 권혜민이란 자를 찾으러 나설 테니까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겠지요."  김태환 작가 (월·수·금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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