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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장세련
삽화. ⓒ장세련

대군은 배소로 돌아와 이선달을 불러들였다. 이선달이 배소에 들어서자 대군은 먹을 갈고 있던 시녀 김련을 처소로 돌아가게 했다. 김련이 문을 닫고 나가는 걸 확인한 대군은 붓을 들어 먹물에 담갔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한지에 글자 하나를 썼다. 殺 자였다. 그 밑에 이른 석 자를 적었다. 노각수 였다.  

 대군은 붓을 내려놓고 먹물이 빨리 마르도록 입김을 불었다. 잠시 후에 먹물이 완전히 마르자 이선달에게 건네주었다. 살부를 받아 든 이선달은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판단으로는 노각수가 전적으로 저쪽 사람이라는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잘만 이용한다면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 유용하게 써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유를 묻지 말고 그대로 실행하라. 혼자 힘으로 버거우면 언양 무사들을 데리고 가도록 하라."

 "네, 알겠습니다."

 이선달은 더 토를 달 수 없었다. 모든 일의 판단은 자신이 하는 게 아니었다. 살수가 하는 일은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살수라고 해도 주인의 명령을 거스르는 자는 이용 가치가 없는 것이다.

 "노각수를 처리한 다음 영월에 다녀오너라. 전하께 닷새 후에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하고 오너라."

 "네. 명령대로 수행하겠습니다."

 이선달은 처소에 돌아와 시녀 김련을 불렀다. 아직 잠들지 않고 있던 김련은 이선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선달은 이번에 명령을 수행하고 돌아오면서 주모의 딸 윤미를 배소로 데려올 작정이었다. 이선달의 이야기를 듣고 난 김련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아니면 많이 부족했나요?"

 "그런 게 아니라 너는 궁중 생활을 해보지 않아서 잘 몰라서 그런데 원래는 대군을 수발드는 사람들이 수십 명이 된단다. 그러던 분이 이렇게 혼자 계시니 답답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뭐 할 수 없지요."

 시녀 김련은 새큼하게 대답하고는 자기 방으로 횅하니 들어가 버렸다. 이선달이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대군께서 시녀 김련 때문에 몹시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한 번도 왕가의 법도를 본 적이 없는 김련으로서는 당연하였는데 그것이 대군의 처신을 깎아내리는 꼴이 되곤 했다. 어떤 때는 막무가내로 배소에서 대군과 합방을 하려 하는 바람에 대군이 진땀을 빼기도 했다. 누군가가 김련을 제지할 필요가 있었다. 이선달은 진작부터 주막집 윤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선달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언양 무사들을 데리고 마구령으로 향했다. 일행이 막 순흥을 벗어나려 할 때 포졸들 두 명이 이선달의 길을 막았다.

 "다섯 분은 여기서 잠깐 기다리시거나 주막까지 먼저 가 계시거나 하십시오."

 포졸들은 부사의 명령이라며 이선달만 데리고 순흥부로 갔다. 이선달은 이유를 몰랐지만 가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이선달은 관사로 안내되어 순흥 부사 이보흠과 독대했다.

 "어서 오시오. 김 장군. 갑자기 놀라게 해서 죄송하오."

 "부사어른 안녕하시었습니까? 아침부터 소인을 어인 일로 부르셨습니까?"

 "아주 중요한 일일세. 안으로 잠깐 들어오시게."

 이선달이 관사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 이보흠이 입을 열었다.

 "대군께서 어젯밤에 여길 다녀가셨네. 눈치를 보니 오늘 아침에 자네를 마구령에 보낼 걸 알았다네. 지금부터 내 이야기를 잘 듣게. 대군께는 절대로 비밀로 해야 하네."  

 순흥 부사 이보흠의 이야기로는 마구령에 와 있는 노각수가 살수는 분명하지만, 아직 제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대 놓고 전면전을 하면 이쪽에서 밀리는 것은 당연하고 저들의 명분을 쌓아줄 뿐이라는 것이었다. 저쪽에서 상왕과 금성대군을 죽이지 못하는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명분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믿을 거라고는 민심밖에 없네. 민심이 우리에게 등을 돌리면 설 자리가 없어지네. 노각수란 자도 어차피 사람일세. 살수이기 전에 인간이기 때문에 양심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네. 과연 형제를 죽이고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묻고 또 물으면 될 것이네. 나 역시 녹을 먹고는 있지만, 그 문제에 제대로 답하기는 어렵다네. 구차하게 내 몸 하나 간수하려고 진실에 귀를 닫아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대군을 속이려고 하는 일이 아니네. 일을 제대로 처리하려고 하는 것이니 내 말을 믿어주게." 

 "알겠습니다."

 이선달은 관사에서 물러나 부지런히 걸었다. 언양 무사들은 이미 마구령 초입의 주막으로 가 있었다. 이선달은 걸으면서도 온갖 상념에 시달렸다.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김태환 작가  (월·수·금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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