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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장세련
삽화. ⓒ장세련

 

임영복은 한 대감의 집에서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각동 돌밭에서 돌멩이나 깨뜨리던 임영복이 아니었다. 단단한 주먹과 힘이 어우러져 무사로 다듬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몸은 변해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아련한 상처는 아물리지 못했다.

 임영복이 보름날 밤 각동 돌밭의 버드나무 아래서 성영을 안고 나서 세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첫 관계 이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각동 돌밭에서 만났다. 한 쌍의 원앙처럼 버드나무 아래서 매일 밤 뜨거운 정염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못하던 임영복의 가슴 속에 가시와도 같은 뾰족한 것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당하기만 하고 양보하기만 했던 일들이 어리석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지금의 이 황홀한 순간을 누군가가 빼앗으려 든다면 바보처럼 가만히 있지는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음이 변한 임영복과 처음으로 부딪친 사람이 새아버지였다. 밤마다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냐고 소리를 지른 것까지는 좋았는데 지겟작대기로 임영복의 등짝을 팼다. 임영복은 등짝을 얻어맞는 순간에도 성영을 생각했다.

 "이눔의 새끼가."

 지겟작대기에 얻어맞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마주 치뜨자 새아버지는 독이 올랐다. 재차 내리치려고 지겟작대기를 번쩍 치켜든 순간에 임영복의 주먹이 잽싸게 허공을 갈랐다. 새아버지는 치켜든 작대기를 맥없이 바닥에 내려놓았다. 작대기를 든 손등을 주먹에 얻어맞자 뼈가 부서졌다. 새아버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눔이 이눔이를 연발했다. 임영복이 다시 주먹을 치켜드는 시늉을 하자 그 소리마저 쑥 들어갔다.

 임영복은 자신이 있었다. 세상 사람 누구라도 성영을 지키려는 자기 뜻에 거슬리면 가만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성영은 그렇게 적극적으로 변해가는 임영복에게 기름을 부었다.

 "난 이제 오빠 여자야. 자기 여자를 지키지 못하면 진짜 바보가 되는 거야. 오빠는 끝까지 날 지켜줄 거지?"

 "그럼 지켜주고말고. 아무도 성영인 못 건드려."

 "그럼 우리 결혼하는 거지?"

 성영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말이 튀어나온 순간 임영복은 얼어붙었다. 한 달 동안이나 성영과 사랑을 나누었으면서도 한 번도 결혼이라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결혼은 아주 먼데 나라에서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임영복이 대답이 없자 성영이 닦달을 했다.

 "아이. 오빠 왜 대답을 안 해주는 거야? 나하고 결혼하기 싫어?"

 "아니, 그게 아니고."

 "아니면 뭐야?"

 "결혼을 누가 하는 거지?"

 "누구긴 누구야. 오빠하고 나하고 하는 거지."

 "성영이 하구 나 하구?"

 "그럼."

 " 그럼 지금 하자."

 "장난하지 말고. 난 심각해."

 임영복은 장난을 치는 게 아니었다. 정말 결혼이란 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결혼 이야기가 나오고부터 일은 급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성영은 자신의 엄마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성영의 어머니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딸의 입에서 하마 두 사람이 갈 데까지 갔다는 말을 듣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넋을 놓았다.

 "이 일을 어쩐다냐? 왜 하필 소백정의 아들이냔 말이다. 그것도 의붓아비인데. 너희 아버지한테 말했다가는 너나 나나 다 쫓겨나게 생겼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쩐다냐?"

 정말로 성영의 아버지 조영환은 두 모녀를 내쫓았다. 두 모녀는 갈 데가 없어 각동 돌밭에 나와 부둥켜안고 울었다. 임영복이 두 모녀의 곁으로 다가갔지만 위로할 말이 없었다.

 "자네도 이제 사람답게 살게. 사람답게."

 성영의 어머니는 원망에 가득 찬 말로 임영복을 나무랐다. 임영복은 하는 수 없이 그 자리를 떠나 올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각동 돌밭 건너편의 뼝대바우 위에서는 부엉이가 밤새도록 울어댔다. 다음날 두 모녀는 뼝대바우 위에서 올라가 강물로 뛰어내렸다.

 조영환이 성급했던 자신을 나무라며 땅을 치며 통곡했지만 한 번 강을 건너간 모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넋이 나간 것은 조영환 혼자가 아니었다. 임영복은 온종일 각동 돌밭에서 뼝대바우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어떤 날은 뼝대바우를 향해 큰 소리로 성영의 이름을 불러보기도 했다. 소리는 바위에 부딪혀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왔다. 그 메아리에 귀를 파고드는 소리가 섞여왔다. (월·수·금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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