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삽화. ⓒ장세련
삽화. ⓒ장세련

 '자네도 사람답게 살게.'

 임영복은 도대체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하루는 돌밭에 앉아 성영을 생각하며 뼝대바우를 맥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발치에 커다란 돌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둥그런 호박돌이었다. 그 안에 선명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돌 한가운데 뾰족뾰족하게 솟아 있는 것은 분명 뼝대바우의 모습이었다. 그 뼝대바우 위에 둥근 보름달이 떠 있었다.

 임영복은 돌 안의 그림을 보자 눈물이 울컥 솟아 나왔다. 성영과 첫사랑을 나누던 밤에도 저렇게 뼝대바우 위에 보름달이 환하게 떠 올라 각동 돌밭을 비추고 있었다. 

 다음날 임영복은 그 보름달이 그려져 있는 돌을 지게에 지고 영월 군수를 찾아갔다. 태화산 자락에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할 바에는 영월 관아의 마당이라도 쓸면서 살고 싶었다. 그보다는 각동 돌밭의 버드나무 숲과 건너편 뼝대바우를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져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날은 자신도 성영을 따라갈까 하고 강물을 건너간 적도 있었다. 

 영월 군수의 추천으로 한양 한 대감의 집에 들어간 임영복을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대감과 같이 대궐에 드나드는 벼슬아치가 아니면 모두가 임영복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그런 생활에 물들어가자 각동 돌밭의 쓰라린 기억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한 대감은 중요한 걸음에 임영복을 대동시켰다. 칼을 차고 다니는 검객들보다는 맨주먹으로도 거뜬히 제 역할을 해내는 임영복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임영복은 대궐 곳곳의 지리도 훤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태화산 자락의 소백정의 아들이 출세한 것이었다. 임영복은 이것이야말로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한 대감이 임영복을 따로 불렀다. 평시와는 다르게 한 대감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자네 이때까지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있나?"

 "아니 없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자네를 믿고 쭉 지켜보아 왔네. 이제 정말로 자네의 진가를 발휘할 때가 온 것 같네."

 임영복은 거두절미하고 임무만 내려주길 바랐다. 한 대감은 무겁게 입을 떼더니 내일 대궐문 안에서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했다. 칼을 사용하면 놀라서 도망을 칠지도 모르니 가볍게 접근해서 주먹으로 늑골을 부수어 놓으라고 했다. 바로 죽어도 괜찮지만 죽지 않아도 검이 뒤처리를 할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임영복은 그런 지시를 받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돌멩이도 깨뜨리는 주먹으로 늑골쯤 부수는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분부대로 정확하게 실행하겠습니다."

 "하하하. 내가 자네 때문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자겠네. 자네만 믿겠네."

 그날 저녁 임영복은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진수성찬이 가득한 밥상을 받았다. 그날이 계유년 10월 9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임영복은 다른 살수들과 함께 대궐로 갔다. 한 대감의 지시대로 모두 환관 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임영복이 대궐 문 바로 안쪽에서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약간 숙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틀림없는 환관이었다. 칼을 든 살수들은 대문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첫 번째 목표물이 나타나자 문지기가 임영복에게 신호를 보냈다. 임영복은 대궐 문을 들어서는 목표물에 가볍게 다가갔다.  임영복이 가까이 다가가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소매 속에 감추어놓은 주먹을 꺼내 명치를 내지르자 상대는 끽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살수가 다가와 주저앉은 대감을 궐문에서 한참 떨어진 곳까지 끌고 갔다. 이미 숨이 끊어진 대감은 사지에 맥이 풀린 채 끌려가 목이 잘리고 말았다. 곧이어 다음 목표가 궐문을 들어섰다. 아까와 똑같은 순서로 처리했는데 닭을 잡는 것 보다 수월한 것 같았다.

 임영복은 사람을 죽이면서도 그 일로 인하여 자기가 사람답게 사는데 더 탄탄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은 임영복이 생각한 대로 풀려나가는 게 아니었다. 자신과 함께 살수로 갔던 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갔다. 임영복은 함길도의 회양군으로 보내졌다. 살수의 임무 외에도 거기 머무는 동안 함길도 풍속과 말을 완벽하게 익혀오라는 명을 받았다.   

 "이번에 함길도에서 임무를 완수하고 오면 다음부터는 대궐 안에서 편하게 지내게 될 것이야. 함길도는 예전에 최윤덕 장군이 조선사람의 기개를 오랑캐들에게 보여준 곳이야. 가면 할 일이 많을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임영복은 그다음에는 살수가 아니라 공식적인 벼슬아치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함길도에 가서 때려잡은 사람이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자신이 때려잡은 사람은 오랑캐들이 아닌 조선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엄연한 조선군의 장군들이었다.

 그렇게 함길도에서 삼 년 반을 지내고 나니 한 대감이 한양으로 불렀다. 임영복은 이제야 자신이 제대로 된 자리에 앉으려나 생각했다. 의금부나 포도청에 자리를 하나 마련해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임영복은 그런 자신의 의중을 한 대감에게 슬쩍 내비쳤다.

 "이제 그럴 때도 되었지. 자네 나이가 어떻게 되었나? 이제 여자를 얻어 살림을 차려야 하지 않겠나? 어디 마음에 두고 있은 처자는 있는가?"

 "…"

    임영복은 살림이라는 말에 각동 돌밭의 가슴 아픈 추억이 떠올랐다. 진작에 넓은 세상에 나왔더라면 내가 사랑하던 여인과 살림을 차릴 수 있었을 텐데 생각하니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김태환 작가  (월·수·금 게재됩니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