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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철호(宋哲鎬) 변호사.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과 흉금을 나눌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사람. 긴 실의와 고통의 계절을 보낸다.
민주화 운동과정에서의 고난과 다섯번 선거에서의 고배. 그것을 견뎌내기는 쉽지 않았을 터.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그 강단이 놀랍다.
   사람이라면 열에 열 사람 모두가 오랫동안 자리보전을 하게 마련일텐데, 벌떡 일어나 일에 몰입하면 아픈 마음을 다스릴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속내를 전혀 모르는 지인들은 그 굳센 의지에 혀를 내둘렀다. 생의 지옥과 천당은 경계를 벗어나려는 사람에게는 새의 깃털 무게에 불과한 것이런가. 이제 변호사업에만 전념하겠다는 송철호 변호사를 만나는 이유이다.

 

 ▲오랜만입니다. 먼저 축하드립니다.(송 변호사의 두 딸이 제50회 사법시험에서 함께 합격했다. 자매의 동시합격은 사시 사상 처음이란다. 자연스레 여성의 사회참여에 대한 이야기로도 이어졌다.)
-고맙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군요. 이제 제가 울산에만 쭉 있게되니까 자주 뵙고 재미 나는 이야기를 나누고 지냈으면 합니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예감은 들었습니다만, 함께 합격할 줄은 뜻밖이었습니다.

 

   두딸 사시 사상 첫 자매 동시합격 '큰기쁨'
 ▲이전에 비해 사시라든가 시험에는 여성의 합격률이 월등한 것 같군요. 점차 남성이 당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중요한 자리에는 여성진출이 더딘 것이 사실이잖습니까?
-제가 사시에 합격할 때만 해도 여성합격자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에 불과했죠. 언론보도를 보면 이번 사시에도 남성이 6.5:3.5로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만, 정말 대단합니다. 하지만 중요보직은 아직도 여성들이 능력에 비해 많이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사회의 오랜 관습 때문이겠죠. 점차 나아지리라 봅니다.
 ▲두 따님은 어떤 일을 하려고 합니까?
-제가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있을 때 사시합격자를 사무관으로 채용하려 했으나 희망자가 없더군요. 그래서 은근히 그곳을 권유했습니다만, 큰 아이는 검사, 작은 애는 판사직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역할은 ?
-국민들이 행정이 잘못돼서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하면 조사한 뒤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거죠. 민원만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반복되는 민원에 대해서는 근원적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제도개선에도 나섭니다. 국민의 권리구제기구인 셈이죠.
 ▲얼마동안 근무했습니까? 참여정부 마지막 위원장이었죠?
-2005년 4월 8일부터 2007년 11월 21일까지 근무했습니다. 2년8개월 가량 근무한 셈이죠. 제가 마지막은 아닙니다. 제 다음에 사무처장이었던 신철영씨가 승진해서 3개월 가량 위원장을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청렴위원회, 행정심판위원회와 통합돼 국민권익위원회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비상근 고충위, 국회설득 대통령직속기구로
 ▲어떻게 위원장직을 맡게 됐습니까?
-법무차관에 기용하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원하지 않았죠. 그러자 장관급인 국민고충처리위원장을 맡으라는 통보가 왔고 수락을 했습니다. 몸담았던 법무법인에서 휴직하고 가보니까 비상근으로 돼있더군요.
 그래서 여야 국회의원을 설득해서 2005년 6월에 국민고충처리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해서 했습니다. 국무총리 산하기관에서 대통령 직속기구로 승격되고, 위원장은 국무회의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됐습니다. 두 번 임명장을 받는 진기록을 남겼죠. 처음에는 '위원장직에 위촉'한다는 위촉장을 받았습니다. 장관급이라는 것도 묵시적으로 대우를 한다는 것이지 명시적이지 않았습니다. 법률이 제정된 뒤에 다시 '위원장직(장관급)에 임명'한다는 임명장을 받았던거죠.
 ▲힘이 많이 실렸겠습니다. 많은 일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힘이 실렸다기 보단, 국민애로를 바로잡아 주기 위한 바탕을 만든거죠. 개개인의 민원을 해결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제도개선이 결국 더 중요하다고 보고 그 일에 진력했습니다.
 2006년에만 100여건의 제도개선을 했습니다. 특히 장병이 하기 쉽지 않은 군사민원이라든가 태생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경찰 청문관제도를 넘어서는 경찰민원제도를 도입한 게 큰 보람이었습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때 盧와 인연 20년지기
 ▲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새삼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이 화제가 됐죠?
-제가 83년 10월 사시에 합격하고 부산에서 개업을 할 때 처음 알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울산에 옮겨오고 87년에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되면서 구속노동자 변론을 맡습니다. 그때 혼자 힘으로는 감당하기가 벅차 노무현, 조영래 변호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엄혹했던 시절에 함께 한 것이 마음으로 맺어진거죠.
 ▲울산에 오게 된 사연이라도 있었습니까?
-1977년 사시준비를 할 때 1년동안 성안동에 있는 백양사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울산과의 첫 인연이었죠. 당시 백양사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울산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83년 사시에 합격하고 부산에서 개업을 했습니다. 고교 선배인 울주군 청량면 출신 이영기 변호사가 청조법무법인을 만든 뒤에 울산지부를 열고 저에게 울산에서 활동할 것을 권유해서 87년 2월에 울산에 오게 됐습니다. 당시 사무실은 달동사거리에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1년간 백양사에서 있었던 인연도 작용한거죠. 벌써 21년전 이야기입니다.

 

   사시준비때 백양사에 기거…울산과 첫 인연
 ▲울산에 오신 그 해가 바로 6월항쟁이 불 붙고,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된 해였군요. 어떻게 해서 구속노동자 변론을 맡게 됐습니까?
-사시에 합격하기 전에 한국감정원 부산지사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친화력이 남다른 편이라 노조위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회사 경영층이라든가 간부들과도 척질 일이 없었습니다. 건강한 노조운동이 절실히 필요함을 깨달았죠. 그러다 울산에 왔고 당시 울산은 물론 우리나라 노동계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는 사실은 다 알고 있는 것이잖습니까. 그해 여름 현대엔진에서부터 노동자 대투쟁의 불이 붙기 시작했고, 권용목씨가 구속됐던거죠. 저로서도 노동자 변론을 맡는다는 것이 겁이 났습니다. 당국의 감시를 받는 게 겁나는 게 아니라 노동자의 변론을 맡을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이라 한번 변론을 맡게 되면 계속 맡아야 한다는 부담감이랄까 중압감에 겁이 났던거죠. 어쨌든 변론을 맡았고 늘어나는 업무 때문에 나중에 노무현, 조영래 두 분이 울산까지 와서 도와준거죠.

 

   민주화 성장·인권신장 위해 시민조직 선봉
 ▲그게 민주화운동에 나선 계기였군요?
-그렇다고도 볼 수도 있겠죠. 저는 영국의 예를 자주 듭니다만, 마냥 노조운동을 사시안으로만 볼 게 아니라 건강한 노조운동은 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에 건강한 노조가 있었기 때문에 공산화를 막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유지를 위해서는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구축돼야 하잖습니까. 바로 건강한 노조운동도 핵심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죠. 그때 세례를 주신 박승원 신부님의 권유로 천주교정의구현 부산경남연합 공동대표를 맡았고, 현대그룹 노조 고문변호사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도 참여하게 됐습니다.
 ▲울산민주시민회를 조직하시고, 울산환경운동연합, 경실련, 울산포럼 등의 단체에도 참여하셨죠?-예, 울산사회 건강성과 민주화를 위해 89년 3월에 울산민주시민회를 만들어 4년간 의장을 맡았습니다. 창립멤버로 장태원·이완재·김진석·이상천·진영우·성인수·이상희씨 등이 있습니다. 6월항쟁으로 헌법개정이 이뤄져 민주화는 진전됐다고 보고, 앞으로 민주화 심화와 인권신장, 그리고 합리적인 사회로 발전할 수 있게 새로운 단계의 시민운동을 펴자는 데에 의견을 모았습니다. 나아가 흩어진 시민운동역량을 한 군데로 모으자는 데에도 공감한거죠. 그래서 울산민주시민회가 탄생한 겁니다. 보수층까지 함께 아우른 울산포럼은 울산사회의 이론바탕을 넓히자는 뜻에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정치에 입문한 것은 그런 시민운동이 한계에 부닥쳤기 때문입니까?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큰 작용을 한거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기택씨 두 분이 민주당을 만들자 노 전 대통령의 적극적인 권유 때문에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겁니다. 92년 2월 민주당에 입당하고 바로 그해 3월 치러진 14대 총선에 중구에서 나섰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까?
-지역에서도 정치세력이 견제와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 울산사회의 지형도를 보면 민정당-민자당-한나라당으로 쭉 이어져오지 않았습니까. 그 과정에서 시민단체에서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누가 민주당으로 갈 것인지를 놓고 고민 끝에 제가 민주당에 들어간거죠. 시민운동가들의 논의과정을 거쳐 전략적인 선택을 한 겁니다.

 

   지역정치도 견제·균형 필요해 민주당 선택
 ▲16대 총선까지 3차례의 총선과 두 번의 광역단체장 선거에 나섰죠? 한, 두 차례도 아니고 모두 실패해서 무척 괴로워겠습니다.
-그랬죠. 저도 지는 선거의 괴로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매번 나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의 고통보다는 가족들의 괴로움을 잘 알기 때문이었죠.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은 주지 않을까 많은 고민이 뒤따랐습니다.
 ▲5차례 실패로 나락에 떨어진 것 같았겠습니다. 제가 너무 쉽게 말하는 것 같은데, 당사자의 고통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겠죠.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극복했습니다. 2,3일쯤 쉰 뒤에 가방을 챙겨들고 법정에 변론하러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털고 일어났습니다.

 

   다섯번의 낙선은 발전과정의 시련
 ▲개인적으로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으니까 불행했겠습니다만, 자신이 소속된 정당은 대선에 승리해서 정권을 잡았으니 일정 부분 성취를 이뤘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습니까? 그래서 국민고충처리위원장직도 맡았고요?

   -그랬죠. 사회가 민주화되고 합리성을 이뤄야한다는 대의적인 측면에서 실패를 할 줄 알면서도 나섰던거죠. 우리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저에게 닥친 시련이라고 생각했고, 더 큰 시련을 겪었던 많은 사람들 덕분에 과분한 자리에도 올랐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11월 국민고충처리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 민주당 울산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가 지난 4월 18대 총선에서는 비례대표를 신청하셨죠? 비례대표에 상위 순번에 들었다면 지금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겠습니다. 비례대표에 들지 못한 것이 총선 뒤에 탈당하게 된 이유입니까? 그러면 이제는 정치에서는 완전 떠난 겁니까?
-비례대표 신청은 당의 권유를 받고 한거죠. 그 뒤에 통합과정에서 당의 이미지가 변질되고 일정 부분은 지역화되는 것을 보면서 비례대표가 되기 힘들겠다는 예상을 했습니다. 정치를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도리를 다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총선 이후 적당한 때를 기다린거죠. 그리고 총선이 끝난 다음달에 탈당한 겁니다. 이제는 변호사 업무에만 매달릴 작정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앞에서도 이야기한대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고난과 선거에서 다섯 번 고배를 마시는 아픔을 겪었습니다만, 두 딸이 사시에 동시 합격하고 두 아들도 명문대학에 다니고 있어 자식 농사는 잘 지었습니다. 무척 만족스럽겠습니다.
-아이들이 잘 자라 주어서 아버지로서 무척 고맙죠. 그 고마움을 무어라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녀교육비결, 폭넓은 토론유도 논리력 키워
 ▲큰 아드님은 서강대학교에, 막내 아드님은 시카고대학교 경제학과에 재학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녀 교육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자식 자랑은 하지 않는 것이라는데, 질문을 하시니 어쩔 수 없이 말씀드려야겠군요. 큰아이는 울산중-학성고를 거쳐 서강대학교 4학년에 재학중입니다. 작은아이는 울산중학교 3학년 때 미국 문부성 장학생시험에 합격해서 미국에서 고교과정을 마치고 현재 시카고대학 경제학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어릴 때부터 토론을 유도하는 방법으로 문리를 터득케 했습니다. 이를테면 재판상황 같은 것을 설정해놓고 토론을 하게 한거죠. 그게 논리적인 사고를 키우는 데에 큰 도움을 준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꾸준히 가장 이상적인 삶의 모델을 들려주었죠. 늘 밝은 마음을 가지고 건강하게 일하는 삶이 최선이라고 일깨워줬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는 허허로워라, 즉 자유로워지라고 당부하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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