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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에 피워낸 하얀꽃 가을물 들면 샛노란 열매로 결실
   시골집·과수원 담장이었던 나무 개발바람에 자취 감춰
   약수마을 최씨고택 뒤뜰 우람하게 솟은 노거수 한그루
   가지는 마르고 뿌리는 외과수술…홀대로 남은 상처

 

약수마을 탱자나무는 가지엔 철재기둥을 대고, 뿌리는 외과수술을 한채 최씨 고택 뒤뜰에서 그렇게 모진세월 견디며 400여년을 넘게 살아왔다.

 

탱자나무.
열매는 시큼하기만 해서 구박을 받았다.
가장 쓸모가 없다는 가시가 도리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우리에게 탱자나무는 뾰족한 가시 때문에
울타리용으로 쓰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도 흔하던 탱자나무를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다.
시골집의 울타리로도, 과수원의 울타리로도 즐겨 쓰였던
그 탱자나무가 귀한 존재가 됐다.

 

 울타리용으로 쓰였던 탱자나무에는 우리의 슬픈 역사가 새겨져 있다. 탱자나무를 국토방위의 방책(防柵)으로 쓴 피맺힌 고난의 기록이 간직돼 있다.
 고려 고종과 조선 인조 때의 일이다. 몽고병과 청나라 병사들이 물밀 듯이 침략해왔다. 강화도가 피난처로 쓰였다.


 나라에서는 강화도에 성을 쌓고 전란에 대비했다. 그리고는 탱자나무를 그 앞에 심어 적병들이 쉽사리 덤벼들지 못하게 했다. 얼마나 힘이 없었으면 탱자나무를 방어용으로 썼으랴. 그 탱자나무의 일부가 용케도 살아 남아 거목으로 자랐다. 천연기념물 강화도 갑곶의 탱자나무의 슬픈 사연이다.
 그 슬픈 사연만큼이나 시골에서 자란 윗세대에게는 저마다 탱자나무에 얽힌 애절한 추억을 한 토막씩 갖고 있다. 먹을 것이 귀한 그 시절에는 탱자열매를 따먹다가 시린 맛에 삼키지 못하고 뱉어내곤 했다. 구슬을 살 돈이 없어서 구슬대용으로 갖고 놀았다. 그러다 싫증이 나면 주인 몰래 과일을 따먹기 위해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로 지나다가 가시에 찔려 숱하게 피멍이 나기도 했다. 주인에게 들켜 혼쭐이 난 적도 허다했다.
 그만큼 탱자나무는 우리 겨레의 정서에 깊이 각인된 나무였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우리들 위해서라면
 모든 것 희생하는 부모님처럼
 밑동만 남기고 잘린 탱자나무
 땅속 해충들로부터
 귤나무 보호하고
 물과 영양분 공급해
 실한 열매 맺길 바라는
 내 어머니 같은 나무
 도둑이라도 들까
 비바람에 상할까
 가시 세워 울타리도 되어주는
 내 아버지 같은 탱자나무가
 하얀 꽃 짙은 향기로 피었습니다.
 (이승민의 '탱자꽃')

 

 탱자나무는 중국이 원산지로 아주 오래 전에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우리 나라에서도 자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만큼 오래 전부터 우리 땅에서 살고 있어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나무다.
 5월이면 가시 틈을 비집고 하얀 꽃을 피운다. 진초록색 줄기와 잎 사이로 영락 없이 흰 나비가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모습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9월경이면 3~5㎝ 크기의 노란색 열매가 곱게 익는다. 시큼한 향기가 좋아서 아이들이 코를 대고 맡기를 즐겨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쓴 맛이 나고 시어서 날 것으로 먹기는 힘들다.


 열매는 먹지 못하는 대신 약용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덜 익은 열매를 두, 세 조각으로 잘라 말린 것은 지실(枳實)이라 했다. 껍질을 말린 것은 지각(枳殼)이라고 했다. 모두가 건위제와 이뇨제, 진통제, 해열제로 쓰였다. 지각은 관장제(灌腸劑)로도, 지실은 습진치료제로도 썼다.
 울타리용으로 쓰이던 탱자나무는 개발바람에 밀려 마구 잘려 나가 찾아보기가 힘들다. 간혹 시골길을 걷다 보면 만날 수가 있을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전에 아주 드물게도 정원수로 쓰인 탱자나무가 남아 있다. 그런 노거수 탱자나무가 전국 여러 곳에 있다. 울산에도 노거수 탱자나무가 있다. 북구 중산동 약수마을의 영천최씨 방계손 최일송씨(61)의 고택 뒤뜰에 탱자나무 고목이 자라고 있다.


 북구 중산동 약수마을. 화정과 이화, 갓안마을 등 중산동에 있는 네 개 마을 가운데 가장 큰 마을이다. 울산의 진산 무룡산(453m)과 동대산(444m)에서 이어진 산자락과 북동쪽 삼태봉(629m)에서 뻗어내린 야산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마을 앞과 오른쪽 동천강과의 사이에 들판도 자리잡고 있어서 마을을 이룰만한 곳이었다.
 400여년 전에 마을이 만들어졌다. 영천최씨와 제주고씨와 밀양박씨가 먼저 터를 잡았다. 그 뒤를 이어 200여년 전 쯤에는 문화유씨와 김해김씨, 울산의 토성 학성이씨 월진파가 들어왔다. 여섯 가문이 호각세를 이루며 대를 이어왔다.
 마을 뒤 골짜기에서 솟아나는 약수가 맛이 매우 좋고 피부병에 큰 효험이 있었다고 전한다. 약수(藥水)란 마을 이름은 그로부터 비롯됐다. 조선 말에 마을 이름이 약수(若水)로 바뀌기도 했으나, 1914년에 원래 이름으로 되돌려졌다.


 일제강점기 때인 1921년 울산―경주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마을 서쪽에 철길이 만들어졌다. 철길에 나란히 붙어 신작로도 만들어졌다. 철길 때문에 마을 진출입이 여간 어렵지가 않다. 철길 건너 우측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마을이 들어섰다. 약수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같은 마을이지만, 만들어진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철길 아래 굴다리를 지나 약수마을에 든다. 인가 사이로 난 비좁은 길을 따라 500여m 쯤 가면 2000년 1월에 만들어진 길이 20m의 약수3교가 나온다. 마을 가운데를 가로질러 북동쪽에서 북서쪽으로 약수천이 흐르고 있다. 곧 바로 동천강에 유입된다.


 마을은 약수천을 경계로 좌우로 나눠진다. 동쪽은 다세대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선 반면, 서쪽은 단독주택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대로 옛 마을의 정취가 남아 있지만, 변화의 바람이 점차 거세게 불고 있다.
 약수3교를 지나면 마을구판장이 나오고, 바로 뒤편에 일송정(一松亭)이란 당호(堂號)가 붙은 100여년이 된 최씨의 고택이다. 고택 곁에는 60년대에 지어진 영천최씨 집안의 정자 활산정(活山亭)이 해발 60여m의 뒷산에 기대어 나란히 서있다. 대문 오른쪽에 짙푸른 잎을 매단 엄나무가 길손을 맞이한다. 엄나무는 집안에 함부로 드나드는 잡귀를 내쫓는다는 속설처럼 큰 키를 자랑하고 있다. 최씨는 100년은 훌쩍 넘었다고 귀띔한다.


 뒤뜰에 붙어 있는 야산은 최씨 고택의 후원(後苑)인 셈이다. 뒷산을 포함한 전체 부지는 4천여평에 이른다고 한다. 100여년을 훌쩍 넘긴 아름드리 적송과 상수리나무와 밤나무 등 거목이 빽빽하다. 대숲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300여종의 산야초도 자라고 있다.
 뒤뜰 장독대 곁에 노거수 탱자나무가 자라고 있다. 전문가들은 나이를 350~400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최씨는 450년은 넘는다고 했다. 키는 4.8m. 가슴높이 둘레는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어서 0.9m와 0.35m, 0.5m다. 뿌리부분둘레는 1.65m. 수관폭은 8.8m에 이른다.


 탱자나무의 나이로 봐서는 약수마을이 만들어질 때 심은 것으로 보인다. 다른 지역에 있는 천연기념물 탱자나무와 비교해도 결코 부족함이 없다.
 뿌리부분에서부터 세 줄기로 나뉘었다. 두 줄기는 곧게 뻗었다. 나머지 큰 줄기는 동쪽으로 45도 가량 휘어져 자랐다. 그러다가 1.5m 지점에서 다시 두 가닥으로 나뉘었다.
 그 가운데 아래쪽 것에는 가지가 꺾이는 것을 막느라 철재 버팀목을 세워놓았다. 위쪽 가지의 상단부는 말라죽어 가고 있다. 뿌리부분에는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래도 탱자나무는 수많은 열매를 촘촘히 매달고 특유의 진초록빛을 폴폴 내뿜고 있다. 더욱이 나무 아래에는 역시 진초록색 맥문동으로 온통 뒤덮여 7월의 대지를 초록색으로 화사하게 물들이고 있다. 머잖아 탱자 열매가 노랗게 익을 때면 장독대와 아름드리 적송과 대나무와 고택이 어우러져 한 폭 동양화를 빚어내리라.
 최씨는 행정당국의 노거수 관리에 불만이 많았다. 노거수로 지정만 했을 뿐, 지원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다. 현재 탱자나무의 상태로 봐서는 지금의 위치보다는 위쪽 뒷산에 옮겨 심는 것이 생육에 더 나을 것이라면 머잖아 그렇게 할 것이라고 했다.


 울산에는 동구 화정동에도 최씨 고택의 탱자나무와 비슷한 크기의 노거수 탱자나무가 두 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지난 94년 생활과학고등학교의 건립공사 때 베어져 사라졌다고 한다. 주민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노거수를 문화재로 인식하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울산의 수준 낮은 노거수 보호행정을 여실히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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