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문수산 중턱 나무의자에 누웠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깊어가는 가을 풀벌레 소리에 귀를 열어두고 있다. 먼 데서 들려오는 등산객들의 왁자한 소리가 바람을 타고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진다. 떡갈나무, 잣나무, 상수리나무, 솔 향이 바람을 앞세우고 다가왔다가 순식간에 건너편 골짜기로 옮겨간다. 저 아래 들판 어디선가 들려오는 농부들의 풍년가, 풀벌레
내 이름 끝 글자 조자는 한자로 '복 조'자이다. 가끔 이 복 조자가 한자 사전에 없는 '언니복 조자'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내게는 언니가 넷 있다. 3, 4년 터울이지만 하나같이 짧은 머리에 파마한 뒷모습이 막 쪄낸 감자처럼 포실포실하니 닮았다. 또 초승달처럼 미끄러진 눈두덩이를 모두 쌍까풀 수술을 했는데 그것도 약속이나 한 듯 닮았다. 나
감자국을 끓이려고 감자 상자에 손을 넣어보니 여름에 샀던 감자 한 상자를 그새 다 먹어 바닥이 보이기 시작한다. 쌀독에 쌀이 떨어져 바닥 긁는 소리가 나는 것처럼 마음이 순간 서늘해진다. 감자를 유별나게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을에 쌀가마를 들여놓고 겨울에 김장을 담가 쟁여놓아야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처럼, 감자 철엔 커다란 감자 상자를 사두어야 좀 넉넉
이사를 하기 위해 짐을 꾸린다. 이십 년이 넘게 살던 집을 내일이면 떠난다. 하늘도 섭섭한 마음을 아는지 어두운 표정을 짓더니만 결국 눈물비를 뿌려준다. 이사를 한다니 옆집 할머니가 찾아왔다. 팔순이 넘은 연세에 외롭게 살아가는 분이다. 문갑을 정리하다가 짧은 몽당연필이 보인다. 보얀 먼지를 솜옷처럼 두르고 댕그랑 하게 문갑 밑에 누웠다. 순간 내 마음에서
내일 모레가 추석이다. 오랜만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조상님의 음덕에 감사하며 차례와 성묘를 올리는 추석명절이다. 이미 귀성길은 시작되어 정체현상이라고 한다.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행렬이 긴 꼬리를 물고 거북이걸음이다. 연어가 회귀하듯, 그리운 가족과 고향을 향한 발걸음을 옮기는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가난이 묻어나던 그 옛날 추석이면 온
날씨가 후텁지근해 창문을 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가 쨍쨍하다. 동네슈퍼 앞에 여자들이 모여서 온갖 수다를 떤다. 큰 소리로 웃을 때는 동네에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부산하다. 요즘에는 비만한 사람들도 많지만, 육체적인 비만보다도 말의 비만을 더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언어와 육체에 비만이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아무리
정치인들의 슬로건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을 들라면 2012년 대선 후보 경쟁 때 나온 '저녁이 있는 삶'을 꼽을 수 있겠다. 저녁이 있는 삶. 이 슬로건은 시적이고 낭만적인 느낌을 줄 뿐 아니라 빼어난 정치적 함의까지 품고 있다. 저녁이 실종된 우리 삶을 역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인류는 격양가의 한 구절처럼 '해 뜨면 나가서 밭을 갈
오전에 내가 다니는 '정토사'에서 '임종을 앞두고 미련 없을 만큼 의미 있게 살라.'라는 스님의 법문을 듣고 왔다. 덥다는 핑계로 시원한 콩국만 찾다가 보낸 칠월 한 달이 은근히 아까웠다. 거실 수족관 안에 갇힌 금붕어는 만사가 귀찮은지 먹이를 줘도 미동 없다가 얼음 몇 알을 넣어주자 금세 지느러미와 꼬리를 흔들어 보인다. 나만 더운 것이 아니었다.
땅이름 공부가 한창일 때 '하잠리'를 만났다. 물 아래로 잠길 마을이라는 뜻이 아닌가. 조상의 예언성 땅이름 짓기에 무릎을 쳤다. 그러나 '하잠리(下潛理)'가 아니라 '하잠리(荷岑理)'였다. 언양읍 반천에서 하잠리로 가는 길옆으로 댐이 있고, 댐이 만들어내는 풍광이 빼어나 드라이브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남들은 여유를 부려야 다닐 수 있는 그 길을
얼마 전 고향에 갔다가 사촌 오빠를 만나 "딸그마니도 이젠 쉰이 넘었구나. 세월 참 빠르네" 하는 말을 듣고 뭉클한 적이 있다. '딸그마니'는 어릴 적 내 별명이다. 내가 셋째 딸인데, 이제 내 밑으로 더 이상 딸을 낳지 말라는 뜻에서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이다. 고등학교 이후로 별명으로 불린 적이 거의 없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그것도
수직의 벽면에 담뱃갑만한 것이 붙었다. 허락 없이 더는 오지 말라는 경계표시다. 소리 내어 말을 하지 않아도 굳이 몸동작을 취하지 않아도, 그 앞에만 서면 검문을 받아야 한다. 그래도 비밀번호 '네' 자리를 쓸 때에는 별로 틀리지 않았다. 앞집과 옆집에 도둑이 들고부터는 여덟 자로 바꾸어 놓았다. 숫자를 마치 군번같이 길게 만들고 부터는 명석하지 못한
우리 집 뒤란에는 내 키만 한 제피나무가 한 쌍 있다. 수년 전 이 집으로 이사 올 때 동네 뒷산에서 데리고 온 것이다. 봄이면 새순을 실하게 틔우고 한여름에는 살가운 열매를 달면서 그간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잎은 따서 주로 찌개나 된장국에 넣고, 열매는 바짝 말린 다음 곱게 빻아 추어탕과 매운탕에 넣어 우리부부는 특유의 아릿함을 즐겼다. 제피가루를
지난 5월 18일,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향년 94세. 장작불이 사위어지듯 조금씩 조금씩 생기를 잃어가신 터라 자녀, 손자들 모두 자리를 지킨 평온한 임종이셨다. 돌이켜보면 어머니와의 관계는 마지막 모습처럼 대체로 평화롭고 순탄했던 것 같다. 물론 소소한 갈등이나 불협화음이 없을 수야 없었지만 돌아가시니 모두가 안타깝고 애틋한 지난 추억이 되는 것이다.
훈풍이 몸에 휘감긴다. 때가 때인 만큼 앞집에도 옆집에도 장미가 숭얼숭얼 피었다. 먼발치에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시려온다. 이제는 저 예쁜 꽃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왜 이리 마음이 옥죄여 오는지 가슴조차 멍하다.바다가 다 마르면 살아날까물에서 지기엔 서러운 꽃들진하디 진한 눈물만 흘리네 어릴 때의 추억이 떠오른다. 소풍을 가는 전날은 학교 수업도
자동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동네를 나와 번잡한 로터리를 지나고 젊음이 출렁거리는 대학교 앞을 벗어나면 도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산하다. 핸들을 천천히 부산 방향으로 돌려 한참 달리면 사방은 산이 산을 안고 가까이 다가온다. 비스듬히 누운 채로 오전 햇볕을 쬐고 있는 문수산, 그 품안에 든 '문수사'를 찾는다.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절로 가는 외
이오덕 선생은 '글쓰기 교육의 이론과 실제'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쓰게 하는 목적은 아이들의 삶을 참되게 가꾸어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는데 있다. 목적은 삶을 가꾸는데 있으며, 글을 쓰는 것은 이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된다"고 했다. 20년 전, 나는 이 말을 가슴에 담고 아이들 글쓰기 교육에 뛰어 들었다. 비록 학교 밖 글쓰기 교육
경복궁 하늘에 그득히 고이는 푸른 기운. 조선의 하늘에 넘쳐흐르던 푸른 기운을 느끼고 싶어 가끔은 옛 궁궐을 거닐어 본다. 조선 오백 년을 열고 닫은 경복궁을 찾을 때마다 감회는 새롭다. 세종대왕의 업적을 생각할 때면 대왕의 부왕(父王)인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를 떠올릴 때가 더 많다. 태종 이방원이 조선 개국의 주역이라면 민비 역시 역할은 대단하였다. 태종
남편이 정년을 맞았다. 남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던 일들이 나의 일이 되고 말았다. 그저 하루를 사는 일에 바빠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살았는데 이제는 편안히 쉬라는 날이 온 것이다. 남편은 철도 공무원이었다. 하절기에는 열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로 온 몸을 땀으로 적셔야만 했다. 또 동절기에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레일 위에서 얼음이 되어 돌아왔다.
밤새 비손님이 다녀가셨다. 가뭄 끝이라 텃밭에는 더없이 반가운 단비다. 며칠 전 고구마며 고추 모종을 내놓고 시들시들 말라가던 것에 애가 타던 차였다. 바짝 마른 흙이 불만이던 고것들은 내가 조리로 길어다 준 물로는 시큰둥하더니 잠시 하늘이 내린 물에는 금방 고개를 번쩍 들고 '야, 살았다~'며 기분 좋게 일어섰다. 자연은 때에 맞추어 스스로 조절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