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1년 11월28일, 울산의 한 선비가 지인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불안한 예감이 담겨 있었다. "쇠 185근을 보냅니다. 창을 만들어주십시오" 이보다 앞선 2월 9일에 더욱 비감한 편지를 보냈다. "환난 속에 죽는다면 운명이 쇠퇴한 것일까" 주인공은 성재 장희춘(蔣希春, 1556-1618)이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1592년 4월13일, 왜적이 부산을 침탈했다. 전쟁 발발 1년 2개월 전에 장희춘은 이미 전란을 탐지했던 것이다. 염포 등 울산의 항구에서 대마도 등 일본을 오가는 어민과 무역 중개상들이 정보를 전했을 것이
1085년(고려 선종 2년) 한겨울. 왕의 명에 따라 호부가 공문을 내려 통도사의 경계를 확정 짓는 12개의 장중한 돌비를 세웠다. 울산 헌양현(언양) 남쪽 벌판에도 1기가 세워졌다. '국장생석표'라는 이름의 이 돌은 단순한 표지석이 아니라, 사찰과 국가의 관계를 증명하는 치밀한 권력의 선언이었다. 통도사로부터 동북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 사방 4만 7,000 보의 사역지 중 하나였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 상천리 산37-15번지. 이 장생은 나라가 허락한 경계의 표시였다. 경내 사지를 정리한 후, 통도사에서 호부에 상소했
1930년대, 조선의 농민들은 굶주림을 피해 고향을 떠났다. 울산의 농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혹한 소작료에 신음하던 그들에게 자연재해와 일제의 수탈은 이중삼중의 재앙이었다. 이 시기 일제는 만주 개척을 위한 대대적인 이민정책을 펼쳤고 울산에서도 많은 농민들이 만주행 이민열차에 올랐다. 이름조차 생소한 땅, 눈 덮인 벌판, 그곳에 희망이 있을 것이라 믿고 가족을 데리고 집단으로 만주에 이민을 갔다. 먹고 살기 위한 엑소더스는 당시 신문기사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1929년 가뭄과 1934년 갑술 대홍수 등으로 남부지방은 초토화되었다
울산의 산과 강, 그리고 정자와 누각은 단순한 자연경관을 넘어 조선시대 사대부 계층의 세계관과 미의식이 투영된 문화적 공간이었다. 고려 말 1342년, 지울주사(知蔚州事) 설곡(雪谷) 정포(鄭苞)가 태화루와 평원각, 장춘오, 망해대 등을 선정해 울산 최초의 '팔경'을 제창했을 때, 이는 지역 풍광의 목록화를 넘어 중국 문인문화의 수용과 토착화의 첫 시도였다. 8경의 원류는 중국 호남성 동정호 남쪽,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만나는 지점의 '소상팔경(瀟湘八景)'에서 비롯되었다. 송대(宋代) 화가 송적(宋迪)이 산시청람(山市晴嵐),
드라마 추노는 조선시대 도망 노비를 추적하는 노비 사냥꾼의 이야기다. '추노(推奴)' 또는 '종추리'는 도망간 노비를 찾아 데려오는 일을 가리키는 말로, 조선 후기 신분제 동요를 상징하는 사회 현상을 표현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추노 사건이 빈번히 기록돼 있다. 몰락 양반들은 도망 노비를 찾으면 상당한 재산을 확보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이미 타지에서 새로운 신분으로 정착한 도망 노비들은 죽기 살기로 저항했고, 노비에게 신공(身貢)을 받으러 다닐 정도로 몰락한 양반은 경제력과 사회적 영향력이 노비만도
서생포왜성은 임진왜란의 비극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유적이다. 지금은 성벽 일부만 남아 있으나,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 침공의 전진기지로 삼았던 곳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전쟁과 야만의 흔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인연'과 '보은'의 스토리도 있다. 울산 의병과 사명대사, 이겸수와 장희춘, 마귀(麻貴)와 편갈송(片碣頌), 그리고 천만리(千萬里) 장군 등. 이들의 이야기는 전쟁 속에서도 인간의 의리와 신의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일본 구마모토 '울산마치'에서 만난 서생씨(西生氏) 후손들, 포
"세계에 류례 업난 됴선의 원형 감옥… 삼백 년 전 리도 시대의 유적" 1926년 11월 25일 '신한민보'에 실린 기사다. 같은 날 '동아일보' 역시 "세계에도 없는 조선의 원형 감옥"이라는 표제로 보도했다. 경주, 울산, 공주, 안주 등지에서 300년 전 조선시대 원형 감옥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언론이 "동양은 물론 유럽에서도 보기 어려운 유적"이라고 평가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원형 감옥(circular prison) 개념은 18세기 말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파놉티콘(Panopticon)을 통해
19세기 조선은 처음으로 서양과 전쟁을 치렀다. 1866년 10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프랑스군이 침략, 강화도를 점령했다. 조불전쟁 또는 병인양요이다. 임란과 병자호란에 이어 조선이 당한 세 번째 외침이었다. 이때 서구 제국주의의 무력을 처음 접했다. 병인양요의 강화도 전투 중심에 언양 사람 김기명(金沂明)이 있었다. 10월 16일 강화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막강한 화력을 퍼부었다. 이때 양헌수는 화력에서 절대 열세인 우리가 상대를 제압하려면 정면승부는 절대 불리하고 기병 작전뿐이라고 판단해, '어융방략(禦戎方略)'으로 강화도 수복
역사 속 울산 사람들은 부정부패에 침묵하지 않았고 호랑이보다 무서운 가혹한 세금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193년 초전(울산) 효심의 난을 경험한 울산인들은 19세기 조선 봉건사회 붕괴 시점과 근현대에도 정의감을 숨기지 않았다. 19세기와 근대의 여러 울산 민란이 그 증거이다. 삼정문란과 세도정치의 폐해로 1862년(철종 13년) 임술농민 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울산 농민들도 과도한 환곡 운영에 저항해 민란을 일으켰다. 경상좌병사 정주응이 4,000석의 환곡을 신설해 8개 면민에게 분배하자, 농민들이 분노했다. 그러자
1592년 4월 13일에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거침이 없었다. 14일 부산진성, 15일 동래부를 잇따라 함락했다. 다음 목표는 울산. 4월 19일 언양읍성을 점령하고 21일 경주로 가는 길목인 울산 읍성과 경상좌병영성을 모두 침탈했다. 울산 병영의 경상좌병사 이각이 도망가고 관군은 달아났다. 울산읍성과 좌병영은 손쉽게 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곧바로 4월 23일 울산의병이 창의 거병해 5월 7일 병영성을 습격해 수백 명을 베고, 군기와 군량을 뺏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울산의병은 경주 의병이나 관군과 연합 전투를 했고 개운포와
"울산 앞바다에 구름 걷히고, 승승장구하며 추격하는 함대의 용맹에 침몰하는 러시아 류릭호" 1904년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일본 군가의 첫 구절이다. '울산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일본 제독 가미무라 장군을 칭송하는 군가의 무대는 다름 아닌 울산 앞바다였다. 8월 14일 새벽 4시 25분. 울산 남방 해상에서 일본 제2함대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함대가 맞붙었다. 황해 해전 4일 후에 도주하던 러시아 함정을 일본이 추격하면서 벌어진 교전이었다. 일본의 장갑순양함 4척과 방호순양함 2척과 러시아 장갑순양함 3척이 참전했다. 일본 순
1927년 10월 17일 월요일 오후 3시. 언양 장날이었다. 가을 햇살이 좋았고, 장터는 언양과 서부 5개 면, 경주와 밀양 양산 청도 등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상북면 등억리 산골에 사는 김경도(34세)도 한 대목 보려고 숯을 한 지게 지고 장터에 왔다. 오전에 숯을 다 팔았으니, 기분이 좋았다. 점심을 먹고 장터 옆 동부리 180번지 가게 앞에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성냥이 없어 길 건너 가게에 다가가 주인 가리야(刈屋益槌)의 부인에게 성냥을 청했다. "담배 피우게 성냥 한 개만 빌립시다" 그러자 가리야의 부
1945년 8월 16일, 울산 읍민들이 북정동 언덕에 모여들었다. 동헌 뒤편, 지금의 울산시립미술관과 울산초등학교 터가 있는 북쪽 언덕배기였다. 시가지 전체를 내려다보는 높은 자리, 한때 울산의 랜드마크처럼 우뚝하던 일제의 신사가 있었던 곳이다. 주민들은 곡괭이와 망치를 들고 제단을 허물었다. 도리이(鳥居)는 힘겹게 뽑혀 쓰러졌고, 그 잔해는 땅속에 묻혔다. 침묵 속에 오래 참아왔던 조선의 분노와 수치심이 그날 처음으로 흙바닥 위에서 숨을 쉬었다. 울산에도 신사가 있었다. 한곳도 아니고, 세 곳 이상이었다. 울산 신사와 방어진 신사
울산이 낳은 두 사내가 있었다. 한국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로 남은 이들이다. 한 사람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갖은 핍박 속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다 끝내 희생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평생 어둠과 악의 편에서 조국을 배신하고 짓밟았다. 유방백세와 유취만년의 대명사인 두 사람은 이관술과 노덕술이다. 울산에서 고향인 두 사람은 한 시대를 정면으로 가로질렀다. 그들의 발자취는 극과 극으로 갈라져, 결국 서로의 운명을 뒤틀었다. 학암 이관술, 1902년 울산 범서 입암리에서 태어나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를 마치고 동덕여고보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태종실록(1412.2.3)에 '정당한 이유 없이 본처를 버린 언양 감무 정포를 파직시키다.' 라는 기사가 있다. 감무는 속현이나 작은 지방에 파견된 지방관인 수령이다. 정포는 최 씨와 결혼해 부친상을 함께 치른 뒤 안 씨에게 새로 장가들었다. 부모상을 함께 치른 아내는 칠거지악에도 해당하지 않는데 특이한 경우다. 정포는 다시 전처인 최 씨를 찾아와 자식을 낳았는데 까닭 없이 최 씨를 또 내버렸다. 두 번이나 버림받은 최 씨가 고발했다. 인간으로서의 기본 도리를 저버린 범죄, 강상죄에 해당한다. 구속된 정포는 아내의 부정을 허위로 꾸
나는 '미하리'였다. 감시병, 망보기라는 일본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유달리 눈이 밝았다. 별빛만 있으면 밤길에서도 엽전을 골라냈고, 가을 들판에서 메뚜기가 툭 튀기만 해도 그 궤적을 따라 손으로 잡아챘을 정도였다. 모두가 신기해했고, 밝은 눈이 내 평생의 복이 될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 눈은 결국 나를 바다로 내몰았다. 고래를 쫓는 자리, 일본 포경선 망루 위였다. 당시 조선인 미하리는 극심한 차별 속에 왕복 항해에 두달이나 걸리는 남빙양 포경에 나섰다기 1∼2개월 휴가를 받아 집에 와서 신나게 놀았다. 주민들의 선망의 대상이었
태화루 앞 장터. 가마 주변에 네댓의 가마꾼과 양반 차림의 조선인, 그리고 허름한 차림의 시종으로 보이는 이들이 서 있다. 오른편에 아이 한 명과 개 한 마리가 보인다. 전설 속의 토종개 '동경이'다. 아이는 동경이의 주인인 듯하며 이를 통해 당시 울산에도 동경이가 적지 않게 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한다. 촬영 시기는 1910년대와 1930년대로 추정한다. 태화루(학성관) 앞에서 찍힌 동경이는 품종 표준화의 실마리를 제공한 만큼 역사적 가치가 크다. 현재 남아 있는 동경이 사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마지막 흔적인 셈이다. 150
조선 전기, 통신사의 원형이자 전문 외교관으로 한류의 원조라 할 이예(李藝, 1373~1445) 선생. 그는 대일 외교 분야에서 세종이 무한 신뢰를 보낸 주인공이었다. 학성 이씨 시조로 호는 학파, 시호는 충숙공이다. 선생은 태종과 세종대에 걸쳐 44년 동안 무려 40여 차례 일본과 대마도, 유구국(琉球國, 오키나와), 이키섬(壹岐島) 등을 오가며 외교 사명을 빈틈없이 수행했다. 포로로 끌려간 동포 667명을 찾아 쇄환했다. 일본인의 존경을 받았던 조선의 외교관이었다. 조선이 건국된 지 5년 후인 1397년, 대마도 왜구 비구로고가
'울산에서 땅이 갈라지고 물이 솟구쳐 나왔다' 1643년 7월 24일(음력 6월 9일) 울산 앞바다에서 발생한 지진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의 한 장면이다. 바닷물이 육지를 뒤엎은 쓰나미로 진도 6~7 규모였다. 1643년의 실록에 실린 총 4번이 지진 기사 중 '울산 대지진'은 내용이 상세하다. "이달 9일 신시(15시~17시)와 10일 진시(07시~09시)에 두 차례 지진이 일어나 울산부 동쪽 13리 되는 곳에서 바다 가운데의 큰 파도처럼 물이 격렬하게 솟구쳐서 육지로 1, 2보까지 밀려왔다가 도로 들어갔으며, 마른논 6곳이 갈라져
연오랑세오녀 전설은 신라 제8대 아달라왕 4년(157년)의 기록이니 꽤 이른 시기부터 신라의 동해와 일본 간에 왕래나 이주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 석우로(昔于老) 열전 등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왜의 침략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울산과 가까운 감포의 '동해구'도 그 증거 중 하나이다. 신라가 외부 도래인과 조우한 항구로 가장 먼저 기록된 곳은 양남 하서리의 아진포이다. (삼국유사 기이 탈해왕) 석탈해가 수로왕에게 패해 경주로 도망갈 때 울산 바다를 지나갔다. 박제상은 울산 율포에서 배를 띄웠고 미사흔은 귀국길에 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