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효(信孝)거사는 충남 공주 출신으로 신라의 승려이다. 삼국유사에 어려서 부터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모셨다고 전한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고기 없이는 밥을 먹지 않아 신효는 매일 같이 산과 들에서 고기를 구해와야 했다. 하루는 길에서 학 다섯마리를 만나 활을 쏘았는데 그중 한 마리가 날개깃 하나를 떨어뜨리고 모두 날아가 버렸다. 신효가 한쪽 눈을 감고 다른 눈으로 깃을 들여다 보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짐승으로 보이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상하게 여긴 그는 고기 대신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어머니에게 고기 반찬으로 대접했
신라 진흥왕때 화랑제의 전신인 원화제가 있었다. 용모가 단정한 젊은 여성을 상대로 원화를 뽑아 나라를 이끌 인재를 삼고자 했다. 그중 남모와 교정( 준정)을 대표 원화로 삼았는데 둘은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많은 소년들이 그녀들을 따르게 된다. 두 원화를 따르는 소년들이 날로 늘었는데 특히 남모가 추천한 원화가 더 많이 뽑혔다. 원화의 세력이 남모를 중심으로 형성되자 교정이 질투를 한다. 어느날 교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불러 들여 왕이 내린 술을 억지로 먹여 취하게 만든다. 그리고 의식이 없는 남모를 서라벌 북천으로
아리나발마(阿離耶跋摩)는 불교를 공부하러 당나라로 간 신라의 승려다. 627년에서 649년 사이, 당나라 장안에서 인도까지 걸어갔다. 나란타사(那爛陀寺, 인도 북구 비하르주 날란다사원)는 학승 1만명과 교수 1,500명이 있던 세계 최초의 대학이다. 먼 타지 서축국(西竺國)에서 아리나발마는 율장(律藏, 계율집)과 논장(論藏, 해설집)을 익히고, 조개 껍데기에 경전을 베껴 쓰며 정진했다. 나란타사에는 무너져 내린 기둥 옆으로 승방, 주방, 욕탕, 빨래터와 도량의 자취가 남아 있다. 신라에서 당나라로, 당나라에서 인도까지 걸어서 간 승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진한사람이다. 도량이 넓고 글이 좋았다. 일찍 이름을 떨쳤으나 남진의 선승들에겐 못 미쳤다. 그가 삼기산(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금곡산)에서 4년째 수행하던 어느날 한 걸승이 원광의 토굴 옆에다 절을 지었다. 원광이 밤에 불경을 외울 때 였다. 어디선가 천신(天神)의 말이 들려왔다. 천신은 행실과 수행이 나쁜 걸승을 피해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나무란다. 원광이 걸승에게 천신의 말을 전하자 여우 귀신의 꼬임에 속아 넘어갔다며 핀잔을 받는다. 다른날 천신이 다시 원광에게 다가와 아직 떠나지 않은 것을 알게 되
신라 신문왕 3년 683년 재상 충원공이 있었다. 그는 온천욕을 매우 좋아했는데 공무중에도 빠져 나와 온천욕을 즐겼다고 한다. 특히 그는 장산국(萇山國 부산 동래온천)의 노천족탕을 자주 찾았다. 잘 걷지 못하는 한 할머니가 있었는데 어느날 다리를 저는 학이 뜨거운 김이 나는 물가에서 잠시 머물다가 가는 것을 보게 된다. 할머니가 그 물가에 가까이 가보니 뜨거운 물이 샘 솟고 있었다. 할머니는 학 처럼 다리를 담그고 족욕을 해보았다. 그러기를 며칠을 거듭하자 제대로 걷지 못하던 할머니는 다리가 말끔히 나아 온전히 걸을수 있게 되었다
경주 남산에는 삼화령(三花嶺)이란 곳이 있는데 두 가지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첫번째는 신라 선덕여왕 때 생의(生義)라는 승려가 도중사(道中寺)에 머물고 있었는데 하루는 꿈에서 어떤 스님이 그를 데리고 남산에 올라가 풀을 묶어 표시하게 하고 자신이 이속에 묻혀 있으니 꺼내어 산마루에 편히 묻어 달라고 한다. 꿈에서 깨어난 스님은 친구와 함께 경주 남산에 올라 남동(南洞) 어느 골짜기에서 풀을 묶은 자리를 찾아내 땅속에서 묻힌 석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안에 봉안된 커다란 미륵상 1구와 보살상 2구의 불상을 있었다. 이 삼존불
오디오클립 '오대산과 오만부처'편에서 장창호 작가는 오대산에서 얽힌 두가지의 전설을 전하고 있다. 첫번째 전설은 신라 자장스님이 당나라 유학시절 일만명의 보살이 산다는 중국 오대산을 찾았는데 꿈속에서 태화지라는 못을 지나다 문수보살을 만나게 된다. 신라로 돌아온 자장은 황룡사 구층목탑을 지어 왕좌에 오른 선덕여왕의 입지를 다지고 승려도 가르치며 율사(律師)의 지위까지 오르며 바쁜 나날을 보낸다. 그리고 당나라 유학시절 만난 문수보살과 인연을 잊지 않고 태화사, 통도사 등 울산과 양산에 이름난 사찰을 짓고 문수 신앙을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만어산에 만어사(萬魚寺)라는 오래된 사찰이 있다. 가락국 수로왕때 지어졌다는 이 산사 아래 비탈진 곳에 수많은 검은 너덜바위가 널리 알려져 있다. 바위를 손으로 두드리면 종소리가 난다 해서 종석(鐘石) 혹은 경석(磬石)이라 부르는데 '만어산 암괴류'라는 명칭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절의 창건과 관련해 두 가지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삼국유사 탑상편 어산불영(魚山佛影)조에 전하는 첫번째 전설은 가야 수로왕때 인근에 있던 한 연못에 악한 용이 살고 있었는데 악행을 저지르는 여귀신인
통일신라 경덕왕 때 분황사에 한 여인이 어린 아이와 함께 찾아와 지극정성을 들였다 한다. 엄마 손을 잡고 분황사 경내에 들어선 다섯살배기 아이가 안타깝게도 세상의 빛을 볼수 없는 맹아였다. 어둠에 갇힌 자식을 위해 희명(希明)은 법당의 천수대비 벽화 앞에서 정성 들여 절을 올리고 또 엎드려 기원했다. 어느날 간절한 마음을 담은 향가를 지어 아들에게 노래 부르게 하자 애틋한 진심이 하늘에 닿았을까 아이는 눈을 뜨게 된다. 이 향가가 10구절로 나눠 지은 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이다. 장창호 작가는 분황사에 전해지는 전설을 소리 연기
서라벌에 높은 벼슬(각간 角干)을 했던 민장(敏藏)이란 사람이 자신의 집을 시주해 지은 민장사(敏藏寺)라는 절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절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우금리(禺金里)란 곳에 살던 보개(寶開)라는 여인과 아들 장춘(長春)이 있었다. 장춘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가난한 집을 일으키기 위해 상선을 타고 멀리 바다로 나섰다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실종된 아들을 위해 여인은 민장사를 찾아 7일간 관음보살상(磁觀音菩薩像) 앞에 엎드려 기도를 드렸더니 애타게 기다리던 아들이 느닷없이 돌아왔다. 조췌해진 아들은 그간 있었던 사연을 털어
신문왕의 아들 효소왕은 낭도가 1천여명이 따르던 화랑 부례랑(夫禮郎)을 대표 화랑 국선(國仙)으로 삼았다. 부례랑은 자신을 따르던 많은 낭도 중 안상(安常)을 가장 아껴 수제자로 삼는다. 어느날 그는 낭도들을 거느리고 금란(金蘭, 강원도 통천)지역에 유랑을 떠났다가 급습한 말갈족에 붙잡혀 납치를 당하고 만다. 낭도들은 유목 민족 말갈의 거친 칼날에 혼비백산해 모두 도망갔는데 오직 안상만이 부례랑을 구하려 말갈땅을 향한다. 뒤늦게 나라도 부례랑을 구하려 신문왕이 물려준 신비의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의 힘을 빌리려
신라에는 3곳 사찰에 있던 영험한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을 일컬어 삼소관음(三所觀音)이라 불렀다. 그 중 하나가 선덕여왕릉이 있는 경주 배반동 낭산(狼山)의 중생사(衆生寺)이다. 지금은 절터만 남았고 사찰에 있던 관음보살상에 대한 여러가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 설화들 중 첫번째가 낭산 중생사의 관세음보살상을 만든 화공의 이야기이다. 옛날 중국의 한 황제가 빼어난 미모를 지닌 여인을 무척 아꼈는데 어느날 솜씨가 뛰어난 화공(畫工)을 불러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정성스레 여인의 그림을 마무리 하던 화공이 그만 붓을 떨어뜨려
신라 제54대 경명왕 때 신라 최초의 사찰 흥륜사(興輪寺)에 큰 불로 절의 남문과 건물 2동이 불타버렸다. 흥륜사는 신라 미추왕때 고구려 승려 아도가 성국공주(成國公主)의 병을 낫게하고 처음 지어졌으나 곧 폐허가 되었다.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 땅에 불교가 공인되자 진흥왕이 경주 탑동 오릉(五陵)과 봉황대 사이에 다시 지은 신라 최초의 사찰인데 까닭 없이 화재가 난 것이다. 스님들은 불자들과 부호(富豪)들을 만나 사찰 복원를 위해 서라벌을 동분서주했다. 왕도 불이 난 사찰을 찾으나 차 공양만 받고 불사(佛事)에 대한 아무런 도움을 주
경주 황룡사 금당 입구인 중문지를 지나면 오른쪽편에 종루에는 커다란 종이 있었는데 잘 지켜졌더라면 세계에서 가장 큰 종(鍾)이 되었을 것이다. 불교 문화의 꽃을 피웠던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때 왕자가 없어 왕실의 큰 근심이 되고 있었다. 극성스런 신하들의 등에 떠밀려 왕비 자리에서 물러난 삼모부인(三毛夫人)은 왕실 사찰에 황룡사에 큰 시주(施主)를 했다. 그리고 여러 보시(布施)가 모여 황룡사에 높이가 3m가 넘고 두께 27cm. 무게 108톤에 이르는 초대형 종을 만들어해 안치했다. 현존하는 우라나라의 가장 큰 종인 성덕대
백제의 특사 자격으로 신라로 건너온 아비지(阿非知)는 황룡사에서 구층목탑 건립공사에 뛰어들어 전력을 다하나 건축 총책임자로 온 선덕여왕의 매제인 김용춘(金龍春)과 사사건건 맞닥 트리게 된다. 아비지는 김용춘의 집에 머물며 목탑의 중심기둥 탑주를 세우려 매진하던 어느날 어여쁜 한 여인을 만나 그녀를 가슴에 품게된다. 선덕여왕의 동생 천명공주(天明公主)와 결혼한 김용춘의 딸 아미 낭자였다. 두 사람의 풋풋한 사랑이 커가는 사이 황룡사 3개의 금당 앞에 높이 80m가 넘는 구층목탑의 탑주가 세워졌다. 그러나 아비지는 적국의 공격에 백제가
50여년이 넘도록 왕권을 굳걷히 지킨 신라 진평왕에 이어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된 선덕여왕이 등극하자 선대 왕들과 달리 나라 안팎에 근심이 늘어가고 있었다. 여왕이 즉위한 신라의 소식에 백제 의자왕은 고구려 실권을 장악한 연개소문과 손을 잡더니 호시탐탐 국경을 공략하며 신라 땅을 넘보고 당나라 황제 태종 이세민도 향기가 나지 않는 모란꽃 그림을 선물로 보내 신라 여왕을 조롱한다. 공주가 왕좌에 오르니 신하 마저 머리 쪼아리기를 주저하는 느낌을 받던 여왕은 위기를 타개할 묘책을 찾게 된다. 때마침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승려 자장(慈藏
573년 음력 2월 신라 진흥왕때 서라벌 남쪽 하곡현 사포(絲浦, 울산 중구 반구동 일대) 앞 바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배가 나타났다. 배 안을 살펴보니 사람은 없고 만들다만 부처 형상과 함께 문서가 있었다. 이 문서에는 황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푼을 모아 서축국(西竺國) 인도의 아육왕(아쇼카왕)이 석가모니 금동불상을 만들려다 매번 실패해 여러 배에 나눠 실어 보내 누군가 불상을 완성하기를 기원한다고 적혀 있었다. 아육왕이 띄운 여러 배 중 하나가 수 백년 세월이 흘러 신라에 도착한 것이다. 이에 왕은 배가 도착한 사포 인근 동쪽의 마골산(麻骨山,
고구려 초 성왕(聖王)이 국경을 둘러보다 요동성에 이르러 오색구름이 휘감아 덮는 곳을 발견했다. 그 구름이 범상치 않아 구름속으로 들어 가보니 지팡이를 든 승려가 홀로 서 있어 가까이 다가가자 나이든 승려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3층의 흙탑이 있었는데 그 모양새가 마치 솥을 엎어 놓은 것 같은 모양의 육왕탑(育王塔)이다. 왕이 사라진 승려가 서있던 땅을 파보라 명하자 땅속에서 지팡이와 신발 그리고 산스크리트어(범어 梵語)로 된 명문(銘文)이 나왔다. 마침 그 글을 아는 신하가 있어 명문을 읽으니 이 흙탑이 불탑(佛塔)이
신라 진흥왕때 월성(月城) 동쪽 용궁(龍宮) 남쪽 황룡사(皇龍寺, 경주 구황동)에 가섭불 연좌석(迦葉佛宴坐石)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남아 있다. 장창호 작가는 궁궐터에 세운 황룡사에 석가모니 이전 시대의 부처로 가섭불이 설법을 하며 앉았다는 연꽃이 세겨진 바위를 일컫는 연좌석에 대해 소리연기를 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인도 불교 전래 이전(전불시대 前佛時代) 신라에는 일곱 부처가 있었는데 그중 6번째가 부처가 가섭불이며 또한 서라벌에는 일곱곳의 사찰 칠처가람지(七處伽藍址)도 있었다. 칠처가람지는 월성 동편에 황룡사(용궁 남쪽)
중국 수나라 백만대군의 네차례 침략을 물리친 고수전쟁의 숨은 영웅 영양왕(嬰陽王)이 숨지자 을지문덕과 함께 수나라를 물리친 왕의 이복동생 건무(建武)가 왕위에 오르니 제27대 영류왕(營留王)이다. 수나라를 멸하고 나라를 세운 당나라 이연(李淵)도 요동(遼東)영토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않자 고구려 재상 연태조(淵太祚)가 왕명을 받아 천리장성을 쌓다 숨진다. 재상의 아들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막리지 자리를 이어 받고 천리장성 대업을 완성하게 된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친당과 강당으로 당나라 외교정책에 대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며 왕과 갈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