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진.

울산의 미래는 대한민국의 미래다. 지난 1962년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된 울산은 그동안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이 됐다. 지난해 단일도시의 실적이라고는 믿기어려운 수출 800억달러를 기록하는 등 세계적인 도시의 반열에 올랐다. 공업화 산업화의 뒷전으로 밀렸던 환경문제도 행정기관과 시민들의 역량을 바탕으로 극복했다. 울산은 이제 산업과 환경, 문화와 역사가 공존하는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본보는 창간 5주년을 맞아 '특집기획 - 울산공업지구 50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해 내년 울산공업화 50주년을 앞둔 울산의 산업화 과정과 그 속에서 소외된 시민들이 상처를 치유하는 모습을 짚어봤다. 또 공업센터 탄생 과정과 울산의 미래 100년의 청사진을 그려보았다.

온화한 기후·기름진 토양·해산물 풍부
목도 비롯 해안절경에 외지인 즐겨찾아
1970년대부터 정유공장 들어서며 변신
실향의 추억·아픔, 화산 망향비로 달래

#고향

▲ 목도.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돌당산 꼭대기 정자에 찾아든 이를 거센 바람이 막았다. 고향의 흔적을 찾는 이들에게 다시는 고향에 갈 수 없음을 분명히 알려주는 바람이었다.

 울주군 온산읍 목도마을이 고향인 박경문(61)씨. 현재 온산읍 이장협의회장을 맡고 있다. 그리고 함께 자리한 황홍근(53)씨는 온산망향비 설립추진위 사무국장이다.

 온산지역 이주민을 대표하는 이들이 각자의 고향이 담겨져 있는 돌당산에 함께 올랐다.
 사방이 훤히 트인 돌당산 정자에서 북동쪽을 가리키는 박씨. 손끝을 따라가니 춘도라고도 불리는 목도상록수림이 보였다. 목도가 있는 목도마을이다.

 이 지역은 지난 1970년대부터 정유공장이 들어서면서 마을은 점점 설 곳을 잃어 갔고, 주민들이 떠난 마을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다 언젠가부터 왕래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박씨의 마음속에 목도는 여전히 푸르게 남아 있었다.
 박씨가 들려주는 목도는 마을 주민들의 제2의 생계 터전이었다. 상록수림에 사철 푸름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리움을 가득 담은 동백꽃이 붉게 섬을 물들이는 곳이다. 때문에 정유공장이 들어서기 전 목도는 인근 주민들뿐만 아니라 외지에서도 상춘객이 즐겨 찾던 곳이다.

 박씨에게는 어린 시절 이곳에서의 특별한 기억이 있었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쯤인 것 같애. 목도를 찾는 관광객 중에 유독 눈에 뛰는 이들이 있었지. 미군이었어. 목도를 비롯한 당목, 달포, 이진, 원산, 우봉 등 온산 해변의 절경은 당시 미군부대에도 소문이 나 미군들이 많이 찾았지."

 입가에, 그리고 눈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박씨는 옆에 있던 황씨를 힐끗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은 분명 아니겠지만 우리 땐 미군들은 동네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어. 그 때 초코바를 처음 맛봤지. 얼마나 달던지. 그리고 미군들이 내주는 깡통은 온 식구들이 푸짐하게 찌개를 끓여 먹었지. 그거 얻으려고 목도에 미군이 보이면 졸졸 따라다녔지. 허허허……. 여기 돌당산에 오르니 그 생각이 절로 나네. 추억이 오롯이 담겨 있는 곳이 지척인데 다시 한 번 내닫기가 쉽지 않아."
 
▲ 우봉
#망향비

돌당산에 오른 뒤 한동안 말이 없던 황씨는 감회가 남다르다.
 이 곳 돌당산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 손길이 묻지 않은 곳이 없다.

    어린 시절 놀이터인 돌당산은 지금 화산근린공원으로 변해했다. 그리고 이주민들의 숙원이었던 망향비가 세워진 곳이다.
 망향비 설립 추진위의 사무국장으로 산파 역할을 했던 그는 주위를 둘려보며 깊은 세찬 바람에 섞인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설명하는 망향비는 자부심이 넘치도록 우뚝 솟아 있었다. 하지만 처연하고 구슬프다.
 망향비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공원 한쪽에 높이 8.5m, 폭 2.5m, 좌대높이 1.5m의 규모로 자리하고 있다. 주위에는 당월, 우봉, 원봉, 산남, 이진 등 마을 사진과 유래를 담은 19개의 비석이 이를 호위하듯 둘러쌌다. 지난 1974년 이곳인 온산 산업기지개발지역으로 발표된 후 1976년부터 이주를 시작했던 10개 법정리 19개 행정마을의 구구절절한 흔적이 담긴 유래비다. 1987년 2차 이주까지 포함하면 모두 2,804세대, 1만3,018명이 고향을 잃고 인근 덕신 지역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야했다.

 당시 이 곳은 산업도시 울산을 만드는 심장부이자 국가산업 발전의 원동력이 됐지만 대신 대대손손 수백년을 살아온 토착민들은 조상의 땅을 떠나야했다.
 그들의 고향인 온산은 오래 전부터 온화한 기후 여건을 갖춰 '따뜻한 산[溫山]'이라 불렸으며, 기름진 토양 그리고 난류가 자주 흘러 해산물이 풍부했던 살만한 고장이었다. 서편을 끼고 흐르는 회야강은 용방소와 같은 기경을 만들며 삼평·강양리 등지에 풍요로운 곡창 지대를 형성했다.

▲ 달포
 왜침을 저지시킨 거남산과 봉화산 등은 자랑스런 구국 역사의 장이였고, 달포와 우봉 마을은 전국 복어 어획고의 50% 가까이를 올리는 어장이었다.

    마을이 동해 바다에 접해 있어 바다어장이 풍부했고 당월·목도·달포 등 해안 마을은 양질의 자연산 횟감이 쏟아졌다. 주민들은 이웃을 서로 사랑하고 도왔다.
 그 다지 넓지 않은 이 지역에 선사시대의 문화유적이 30여 곳에 걸쳐 산재해 있는 것은, 이처럼 예로부터 인간이 살아가기에 매우 좋은 여건을 갖추었던 곳이라는 증거다.

 그러나 공단 조성이 시작되면서 삶의 터전을 잃고 소일거리조차 제대로 갖지 못했던 이주민들은 새로이 적응하지 못하고 척박한 이주생활을 견뎌야했다. 인근에는 타지에서 유입된 공단근로자들과 그 가족들이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면서 불협화음도 잦았다.
 인고의 35년을 보내면서 이곳을 찾아 고향땅을 내려다보던 실향민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선대들을 위로하기 위한 '온산이주민 망향비' 건립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지난해 6월30일 공사를 완료했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