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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낙엽비가 시청 앞 도로를 적시고 있다. 조금 전까지 나무라는 세계에서 나무를 전부로 알고 살았던 나뭇잎들이 훌훌 떠나가고 있다. 곱고 화려했던 어제와 오늘 모두를 버리고 미련 없이 돌아가는 낙엽에서 문득 나의 길이 보인다. 그날은 언제가 될까.

 감상에 빠져 강의실을 향해 걷는데, 저만치 낙엽을 맞으며 오시는 스님. 한 폭 풍경화 같아 감상하는데 스님께서 먼저 합장을 하신다. 아차, 인사의 선수를 또 놓쳤다. 단풍 고운 먼 동화사에서 강의를 오시는 양광스님. 스님께서는 수강생들 눈빛을 읽으시고는 낙엽은 생명의 因이니, 생동하는 봄을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모양 있는 것에서 모양 없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지고, 더 나아가 부단히 육바라밀을 닦아 어떤 경계에도 걸리지 않는 산은 산, 물은 물, 단풍은 단풍으로 보는 눈을 얻으라는 말씀도 주셨다.

 열심히 고개 주억거리며 경청했건만 귀가길 석양 풍경에 넋이 빼앗겨 나는 끝내 구르몽을 떠올리고 시몬을 부르고 말았다. 경계에 걸린 것이 아니라, 아예 경계란 경계는 다 불러와 한바탕 감상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었다. 소리 내어 낙엽을 밟으며 수십 년 메뉴 고엽을 흥얼거리고,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몇 문장을 두서없이 중얼거리기에 이르렀다.

 감상이 상승세를 타니 생물학자의 정의에 서운해 하는 내가 보인다. 쉼 없이 자신을 확장하던 나무가 뿌리로 영양을 저장하기 위해 나뭇잎에게서 수분이며 영양을 수탈해버린 결과가 단풍이라는, 지극히 안타깝고 메마른 정의가 나를 슬프게 한다. 

 하지만, 나는 진실로 슬픈 것일까. 슬프게 하는 실체는 있는 것일까. 마음을 짓누르는 것들을 나열하다 보니 슬프다, 서글프다, 서럽다, 분노하다, 애처롭다, 애잔하다…. 유사한 감정을 나타내는 낱말들이 뒤섞여 올라온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고, 곱고 여린 것도 슬프고, 낮고 작은 것들도 같은 무게의 슬픔을 지니고 다가온다. 그럼 그 동안 이런 낱말들이 의미 구분도 없이 '슬프다'라는 단어 속에 뒤엉켜 있었던 것일까. 슬픔이라 이름붙일 만한 것들을 열어본다.

 접시 위의 뿌리 자른 당근, 시든 어젯밤과 한 모금 물에 팔팔 살아난 오늘 아침 이 생명이 나를 슬프게 한다. 사과나무에서 발견한 풋사과 몇 알, 서리 내린 뒤 애써 버티는 장미꽃과 덤불 속에 묵묵히 말라가는 보랏빛 까마중 이 나를 슬프게 한다.
 볕 좋은 날, 한 끼 밥을 위해 번호표를 타고 줄 서 있는 내가 나를 슬프게 한다. 낡은 카페의 퇴락한 뜰과 주인남자의 굽은 등, 새빨간 색으로 염색한 옆 통로 할머니가 나를 슬프게 하고, 쌓아둔 옷 수레에서 지난 계절의 옷을 끌어내는 내가 나를 슬프게 한다.

 가끔 화면에 등장하는 출세한 문인의 파안대소가 나를 슬프게 하고, 축제장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옛 동료가 인사는커녕 눈길조차 피하던 모습이 나를 슬프게 한다. 부유해진 옛 친구의 선심으로 동행해 간 문인들이 침묵하며 먹었던 점심이 나를 슬프게 한다. 몇 년 전 멀리 떠난 이의 선물이 든 서랍이 나를 슬프게 하고, 그녀가 함께 가자던 얼음골 석양과 사과향이 나를 지극히 슬프게 한다.

 더 커다란 슬픔은 발설할 수 없는 것이어서, 사소한 외로움과 반성과 분노와 그리움과 풍경의 쓸쓸함과 소박한 아름다움이 '슬픔' 아래 모두 웅크리고 있는 나의 마음을 가만히 끌어안아 보는 이 아침이 나를 슬프게 한다.

 사소한 말 한 마디들이 모아져 커다란 오해의 강을 만들었던 지난날이 나를 슬프게 하고, 그로 인해 떠나버린 제자 주연이를 생각하면 더욱 슬프다. 굳건하고 씩씩하게 자리를 영위하는 제자보다 양보하고 한 발 물러선 제자들이 나를 슬프게 하고, 결혼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고집하고 씩씩한 척 걸어가는 나의 세 아이 어깨가 나를 슬프게 한다.

 갑각류들은 탈피 직후 무방비일 때 가장 성숙한다고 들었다. 모두가 깊어지는 십일월, 막 탈피한 듯 더욱 약해지는 나에게 부디 성숙의 기회가 되기를 기도하는 내가 나를 슬프게 한다. 이 모든 것을 열거하며 쓸쓸해하게 하는 십일월이 나를 슬프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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