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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최영철
 
난 왜 그때 그 꽃을 그냥 지나쳤나
내 발길 붙잡으려고
어디론가 바삐 가고 있는 내 발길 돌리려고
제 몸 으스러지도록 향기를 풀풀 날린
그 꽃을 왜 그냥 지나쳤나
난 왜 그때 그 시궁창 그냥 건너왔나
날 빠뜨려주겠다고
내 오물을 제 오물에 씻어주겠다던 손길
왜 모른 채 뿌리쳤나
오물처럼 겁나게 쏟아지던 부귀
내 것 아니라 돌아서고 말았나
내 입에까지 거의 다 들어온 영화
혓바닥 밑에 감추지 못했나 일찌감치
그걸 삼키고 토사곽란을 일으키지 못했나
난 왜 그때 그 꽃을 그냥 지나쳤나
꺾어달라고 꺾어달라고
헌신짝처럼 한 번만 꺾어달라고 매달리던
그 꽃에 찬물 한 사발 뿌려주고 말았나
 
● 최영철 시인- 1956년 경남 창녕 출생.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등단. 시집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 '가족사진' '홀로 가능 맹인악사' '야성은 빛나다' '일광욕하는 가구' '개망초가 쥐꼬리망초에게' '그림자 호수', 산문집 '나들이 부산' '우리 앞에 문이 있다', 어른 동화 '나비야 청산 가자'. 백석문학상(2000) 수상.
 

 

▲ 황지형 시인

□ 작가노트
걷기 좋은 계절 혼자 시집 한 권 읽는 시간이면 좋겠지요. 지금 살아간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고 싶을 때 종종 한 권의 시집을 읽으며 순연해지는 법을 배웁니다. "내 오물을 제 오물에 씻겨주겠다던" 그런 추억을 많이 만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종종 잊고 살지요. 아픈 현재를 이기게 해주는 강력한 진통제라는 사실을 말이죠.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것. 끝까지 완벽하게 속일 수 없다면 솔직해질 수밖에요. 자신의 마음을 읽는 자만이 이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디론가 바삐 가느라 주름진 얼굴에 불만을 달고 있는 뚱한 표정, 간간이 뱉어대는 말투에는 어쩔 수 없이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고난까지 얹어져 있습니다. 내 입에까지 거의 다 들어온 영화도 찬물 한 사발 뿌려주며 물리칠 땐 머릿속에서도 바쁘게 감정신호를 보내오지요. 곧이어 슬픔이, 기쁨이 살아본 삶을 두리번거리게 됩니다. 이제 시집 읽는 시간은 가장 나빴다고 생각했던 일이 지금 가장 나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 속에서 위로받지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 길고 쓸쓸한 언어의 꽃길에 어떤 페이지를 읽어도 당신이 원하는 안전지대로 데려다 줍니다.
 황지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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