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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시절 위안부 합의가 나온 직후 필자는 '면리장침(綿裏藏針)-숨긴 바늘이지만 너무나 잘 보인다'라는 이름의 칼럼의 썼다. 당시 외교장관인 윤병세는 위안부 합의에 대해 "일본 정부의 책임을 사상 최초로 분명히 표현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자신의 언어로 사죄와 반성의 입장을 표명했다"며 "위안부 문제에 사죄와 반성을 회피해 왔던 아베 총리가 외교장관 회담 직후 정상간 전화통화에서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는데, 국민과 국제사회 전체에 향한 정상 차원의 명확한 사죄와 반성"이라고 강조했다. 살아계신 동안 합의를 해야 했고, 진전된 안이기에 타결했다는 주장이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생전에 사죄와 배상을 원했던 것은 이런 식이 아니다.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자신이 죽더라도 제대로 된 사죄, 제대로 된 배상을 원하고 있다. 윤병세는 그 사실을 몰랐을까. 대통령의 대리인이기에 자신의 권한이 아니라고 박근혜 뒤에 숨고 싶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대통령이 결정은 하지만 장관은 실무의 책임자다. 국제사회를 향한 명확한 사죄와 반성이라고 부연설명까지 하는 장관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필자의 당시 주장은 틀렸다. 알고보니 윤병세는 꼭두각시였다. 위안부 합의는 박근혜의 지시로 이뤄졌고 모든 과정에 박근혜 전대통령의 권한행사가 있었다. 참모의 무능을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참모를 무능하게 만드는 대통령이었음을 우리는 몰랐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12월 28일 이뤄진 한일위안부 합의 때 우리 정부가 위안부 관련 단체들을 설득하는 노력을 하고, 해외 '소녀상' 건립을 지원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내용 등을 담은 사실상의 '이면 합의'가 존재했던 사실은 이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당시 위안부 합의에는 외교장관 공동기자회견 발표 내용 이외에 비공개 부분이 있었다. 비공개 부분 내용은 "일본 쪽이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 피해자 관련 단체를 특정하면서 한국 정부에 설득(합의에 대한 불만시 설득)을 요청했고, 이에 한국 쪽은 '관련 단체 설득 노력'을 하겠다며 일본 쪽의 희망을 사실상 수용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특히 일본 측은 한국 측에 '성노예' 표현을 사용하지 말 것을 원했고, 한국 측은 정부가 사용하는 공식 명칭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뿐이라고 했음을 비공개 부분에서 확인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이는 일본 측 요구를 수용한 것임을 뜻한다. 아울러 일본 측이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을 어떻게 이전할 것인지, 구체적인 한국 정부의 계획을 묻고 싶다"고 밝힌 데 대해 한국 측은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고 답한 것으로 비공개 부분에 적시됐다.

문제는 이정도로 끝나지 않았다는데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성사 직후 민간이 추진하는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 유산 등재사업'의 정부 지원 철회를 지시한 사실도 확인됐다. 한일 위안부 합의가 발표된 지 9일 만인 2016년 1월 6일 "유네스코 등재 지원 사업에 한국 여성인권 진흥원이 관여 말고, 추진 과정에서 정부 색을 없애도록 하라"는 당시 박 대통령의 지시가 부처에 전달돼 민간사업 지원을 중단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위안부 관련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을 민간사업자로 선정해 2014년(3,700만원), 2015년(4억4,000만원) 두 차례에 걸쳐 지원하고 있었다.

합의 직후 외교부는 'VIP 지시사항'을 여성가족부에 전달했고, 이후 예산 지원 중단을 포함한 3가지 대안을 청와대 여성가족비서관실에 제시했다. 이후 청와대 여성가족비서관실은 "지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네스코 등재 추진사업에 대한 갑작스러운 지원 중단 결정 이후 민간단체와 시민단체들의 반발이 일자 여가부는 "유네스코 등재는 민간추진이 원칙이어서 정부 지원시 심사에 불리하다"고 해명해 왔는데, 이 배경이 확인된 것이다.

유독 위안부 문제에 민감한 일본이 박근혜 정부의 외교를 유린한 셈이다. 과거사 발언 가운데 위안부 문제만 모으면 한권의 책이 될 정도로 일본 정치인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위안부 문제를 꼭꼭 숨기고 있다. 가능한 들키지 않게 어쩌다 들키면 결코 인정하지 않는 전략을 전후 70년 가까이 반복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를 인정한다면 그리고 아베가 나눔의 집을 찾아 살아 시퍼렇게 멍든 가슴 움켜진 채 마른 숨 쉬고 있는 할머니들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면 사죄와 반성이 맞다. 하지만 무릎 꿇는 순간, 교과서나 독도, 심지어 임나일본부까지 떠벌려 왔던 모든 과거가 치욕으로 돌아온다고 인식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위안부를 모집하지 않았고 강제연행하지 않았다는 두가지 거짓을 옹골차게 쥐고 있으면 어떤 비난도 피해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집단이다. 바로 그 집단에 스스로 면죄부를 쥐어준 박근혜는 국정농단을 넘어 어떤 말로도 국민의 용서를 받기 어렵게 됐다. 참으로 참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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