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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대표작 『100년 동안의 고독』을 관통하는 고갱이는 인간존재는 고독이 본질이란 것이다. 소설을 일별하면, 마콘도―4년 동안이나 줄곧 비가 내리고, 노동자 수만 명이 학살돼 나가기도 하는 가상 도시로 중남미 현대사를 상징하는 공간―을 세운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 부부로부터 시작하여 6대에 걸쳐 세대를 거듭하며 마콘도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시·공을 넘나들며 환상적 사실주의로 서술한다. 그런 속에 서서히 드러나는 윤곽은 인간 존재는 모두 본질적으로 고독하다는 것이다. 그들 주위에 그 어떤 삶이 펼쳐지든 죽음 곧 소멸 앞에서는 고독하다. 작가는 인간이 최후에 맞닥뜨린 그 고독은 관계, 헌신, 사랑 등 그 어떤 것으로도 극복할 수 없고, 오직 그 스스로 겪어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시 <안개 속에서>에서 헤르만 헤세도 "살아있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이라 하였고, 안재찬 아니 류시화 또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그의 시선집 속 표제시에서 본질적으로 인간은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어도 고독하다고 한다.

지난 1989년 어느 날, 시 <빈집>을 쓰고 1주일 뒤 허름한 극장 어둔 객석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시인 기형도는 바로 그 유고시를 통해 이들과 조금 다른 각도에서 고독을 보여 준다. 시를 보면,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 말하며 생의 쓰라림을 토로한 뒤, "짧았던 밤들"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 자신의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 등 외부로 연결된 고리를 철저히 제거한다. 그리고는 곧장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곧 스스로 절해고도(絶海孤島)의 고독이 된다.

여기서 앞서의 마르케스 등 여러 작가들의 그것과 달리 기형도의 고독은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면 극복 가능하다는 점에서 확연하게 구별된다. 한 세대를 거슬러 과거 군사정권에의 부역으로 평가에서 제외되곤 했던 조병화 시인도 1960년대 초반에 출간된 시집 『공존의 이유』를 통해, 사랑만이 우리네 인간의 근원적 고독을 극복할 수 있다고 노래했다. 그러나 정작 남는 문제는 회복의 동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모를까 완전히 소진된 경우에는 외부의 사회시스템이 구비되고 작동되어야 고독은 해결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만 10년 전인 2008년 늦은 가을 어느 날 밤,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읍동, 모두 3가구가 살고 있는 1층짜리 다가구 주택, 평생 독신이었던 김 모 씨(67)가 보증금 700만 원, 월세 10만 원짜리 차가운 방에 빈속으로 누웠다. 그녀는 그때 누운 그 자리에서 남의 손 빌려 다시 일어나기까지 무려 5년이나 걸려야 했다. 이웃은 물론이고 집주인조차 월세가 계속 밀리는데도 보증금 700만 원을 담보삼아 그녀를 찾지 않았다. 정말 아무도.

시인 손현숙은 그녀의 그 절절한 고독을 전해 듣자마자 몽당연필에 침 발라 적듯 자기 가슴에 꾹꾹 눌러 기록했다. "부재중 찍힌 전화가 아홉 번/연락을 할까, 말까 망설인다/아홉은 내가 아는 완전수/그녀는 아홉 벌의 옷을 껴입고 다섯 번의 봄을/백골로 살았다 부산진구 초읍동의 한 빈민가/ 쪽방에서 겨울을 넘기기 위해/방 안에서도 목장갑을 끼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집, 손수 보일러도 끄고, 전등불도 끄고/혹한이 들어오실까,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틀어막고/문이란 문 죄다 닫아걸었다/무덤처럼 동그란 공간 속이 따뜻해라,/아홉 벌의 옷이 일으키는 정전기처럼/수돗물 똑, 떨어지는 소리에/ 몸이 조금 움직였으려나 먼지처럼 소리가 일어서는/집, 이 방 저 방 기웃거리면서/백골이 될 때까지 살았다/머리 가르마처럼 반듯하게 누워서/옷 벗겨줄 사람 없어/아니다, 아홉 겹의 옷을 벗기려면/너무 수고롭겠다, 제 몸을 제가 염했다/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듯/저에게 저를 송두리째 버렸다/ '잘 있었어?' 아홉 벌의 옷을 벗겨내자 /'잘 있어요'로 최후로 달싹, 거리는 백골의 입술(손현숙, <신은 아홉 벌의 옷을 껴입었다>)

이처럼 삶에서 동력이 완전히 빠져나가 불가항력적인 또 다른 제2 제3의 고독을, 백골을 더는 방치해선 안 된다. 인간의 존엄은 지위와 재산 여부와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작동되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앞에서 언급한 인간 본연의 고독과는 아무 상관없다.

정호승의 시 <슬픔이 기쁨에게> 속엔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이라는 구절이 있다. 시의 속을 보면, "나는 이제 너에게도/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여기서 너의 '기쁨'은 귤값을 깎는 자기중심의 이기적 자기애이고, '슬픔'은 할머니의 추위 곧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이타적 속성체다. 즉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너 곧 우리에게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는 것은 이웃의 가난과 소외, 고독이 극복되는 힘은 우리가 그들 이웃에게 쏟는 진실한 관심과 애정임을 강조한 것이다.

필자의 근무처 울산시민학교 교무실 입구에는 6, 70대 늦깎이 학생들이 모아온 복돼지 동전통이 수북하다. 오며 가며 슬쩍슬쩍 올려놓는 그 주름진 손 하나하나 얼마나 어여쁘고 따스운지 모르겠다. 이 엄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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