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초
땡초
  • 울산신문
  • 2020.02.0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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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순 수필가

식자재마다 독특한 맛이 있다. 어떤 것은 신맛, 어떤 것은 단맛, 어떤 것은 쓴맛, 매운맛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이 땡초다. 청양초가 점잖은 이름을 두고 땡초로 통하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사람의 특징에 별명이 따라붙듯, 별칭을 지어 부를 정도로 뭔가 별난 게 있다는 얘기다. 일반 고추와 땡초는 매운맛에서 차이가 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만의 독특한 매운맛을 전제로 한다. 

우리의 음식에는 짭조름, 칼칼한 맛이 생명이다. 한데 급변하는 세상만큼이나 음식 맛도 이전과 같지 않다. 나라 간의 문턱이 낮아져 외부와 교류가 잦아진 탓일까. 음식의 자극적인 맛을 줄이려다 보니 당 성분이 많고 과한 인공조미료가 가미되어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 매운맛의 터줏대감 격인 홍고추도 수확량을 늘리기 위한 개량종이라서 이전 매운맛이 아니다. 칼칼한 맛을 계승하지 못하고 들척지근한 음식에 빛깔 내는 들러리를 서고 있다.

칼칼한 맛에 길든 축들은 음식이 밍밍하면 물을 찾는다. 나도 물을 찾아 입을 헹구어 보지만 그 맛은 쉬 가시지 않는다. 땡초가 대안이다. 아마도 그 고추 개발자는 그 틈새에 착안하여 매운맛을 개발한 것은 아닐까. 땡초를 넣으면 잡내 잡아주는 것은 물론 고유의 칼칼한 맛이 살아난다. 

우리 식구들은 매운맛을 선호해 땡초에 익숙해져 있다. 찌개나 국은 물론이요 쌈장, 얼큰한 찜 요리에도 빠지지 않는다. 특히 장조림 할 때 땡초를 듬뿍 넣으면 육 고기 특유의 누린 맛을 확실하게 잡아준다. 볼품은 일반 고추에 뒤지지만, 매운맛 하나로 식자재 군에 자기만의 차별화된 깃발을 꽂았다. 인생살이라고 다를까.

단체에서 임원진이 연말 결산 보고를 할 때였다. 나이로는 단체의 수장이라 할 만한 어른의 일성이 분위기를 제압했다. 운영체계에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원래 있는 듯 없는 듯 하회탈 미소를 품고 정물처럼 앉아계시던 분인데 그날은 달랐다. 평소 말이 없던 분이 목청을 돋우니 긴장감은 더했다. "이렇게 가다간 호미로 막을 것 가래로도 못 막는다"며 매운 입담을 토해냈다. 어른의 일갈로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은 건 물론이다.

나도 모임에 나가지만 감히 젊은이들 하는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는다. 그게 요즘 늙은이들의 몸 거취 추세다. 어련히 알아서 할까 싶은 마음도 있지만, 솔직히 몸을 사리느라 발톱을 감춘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군말 없는 노인을 점잖은 인물로 대접하는 추세가 아니던가. 한데 노인은 기죽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단한 것은 임원진들의 태도였다. 수행승의 등에 떨어지는 죽비 같은 어른의 찌르는 듯한 호통에 누구도 항변하는 사람이 없다. 다소곳이 귀를 기울였다. 요즘 보기 드문 현상이어서 마음이 더 숙연했다. 내가 꽤 괜찮은 단체에 속해있구나 싶어 내심 흐뭇했다. 

돌아오는 길에 든 생각이다. 입을 떼어야 할 자리에서 입을 닫고 있는 건 삶을 방기 하는 행위다. 한데도 요즘 대부분의 어른이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없으면 잘못을 보고도 두루뭉술 넘어간다. 어른이 그렇게 된 것에 시비를 가리자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다. 예전 어른들은 비록 배움은 짧아도 내남없이 아이들을 선도하는 올곧은 소신이 살아 있었다. 지금은 어디에서도 그런 어른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시대의 힘없는 어른에게 땡초 같은 카리스마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 단면을 삶의 현장에서 본다. 길거리를 가다 보면 비릿한 청소년들이 거리낌 없이 휴지를 버리는가 하면, 당당하게 담배를 꼬나물고 있는 상황을 보게 된다. 누구도 입대는 어른이 없다. 그 나름의 이유야 있다. 개인주의가 대세이다 보니 나와 상관없는 일에 선뜻 나서지 않게 된다. 어쭙잖게 한마디 했다가는 덩치 큰 아이에게 봉변당할까 겁난다.

어느 교사의 입에서 교직에 회의를 느낀다는 말이 나왔다. 교육 현장에서 선생의 말이 먹히지도 않을뿐더러 훈육 차원에서 사랑의 벌채라도 할라치면 어린 제자에게 사진 찍혀 경찰에 고발당하는 수모를 감수해야 된다고 한다. 공부만 잘하면 허물도 오냐오냐 눈감아주는 학부모, 눈치 보느라 몸 사리는 선생님. 

선생도 할 말은 있다고 한다. 시시비비를 가리자면 밥줄에 비상이 걸리니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삶의 바탕을 세우는 교육 현장에 적색 불이 들어와도 어른들은 내 몸 사리기에 급급하니 아이들의 미래는 어찌 될까.

어른의 헛기침 소리에도 몸을 사리던 그 시절이 그립다. 학창 시절, 권위적인 어른들의 훈육에 가슴앓이도 했지만, 돌아보니 그건 삶의 질서를 세우는 나침판이었다. 들척지근한 음식에 땡초 같은 어른의 역할이 필요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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