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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일기 써 보라는 친구의 권유가 있었다. 그날이 그날 같은 삶에 감사할 일이 무에 그리 많아 일기까지 쓰느냐고 했더니, 찾아보면 감사 거리가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삶이 따뜻해진다는 말에 시작했지만, 마음이 담기지 않아 생뚱맞기가 상놈 갓 쓴 격이었다.

습관의 속성인가. 영혼 없는 언행이라도 매일 생활화하다 보니 지금은 제법 입에 붙었다. 요즘 들어 감사의 마음이 깊어진다. 불청객 괴질로 다들 힘든 시절의 강을 건너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현장에 감염자들이 섞여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긴장감은 더하다. 생명을 잃은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화무십일홍이라고 기세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이곳저곳, 이 나라 저 나라로 번져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결국 세계보건기구에서 전염병 경보의 최고 단계인 팬데믹(pendemic)을 선언한 상태다.

이 모든 시원은 편의 위주로 난개발한 사람이 주범이라니 무슨 말을 할까. 우리가 탐하던 편리함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사회적 거리 두기, 마스크 없이는 밖을 나갈 수 없는 환경을 불러왔다. 그런데도 이렇듯 숨줄이 붙어있으니 감사할 일 아닌가. 친구의 말마따나 주위를 돌아보니 감사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질병 퇴치에 밤낮으로 수고하는 많은 의료진과 조력자들, 기부 천사들, 질병 관리 수칙에 따라 같은 방향을 향해 코로나 난류를 건너고 있는 평범한 이웃들, 모두 감사 대상이다. 

전에 없던 감사의 마음이 드러난 지기가 있으니 평소 투명 인간 취급하던 옆 지기다. 잔소리해대는 그가 얄미워 없는 셈 치자 살았는데 그게 아니다. 컴퓨터 앞에 장승처럼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집안을 받쳐주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시쳇말로 남편은 '삼식이'다.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니 밉상일 수밖에 없다. 삼시 세끼 밥상 차리기가 버겁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음식이 짜네, 맵네, 맛이 별로네, 그에게 내가 만든 음식 맛나다는 말은 '금기어'이다. '남의 집 남편들은 돈벌이 못 하면 기라도 죽는다는데 저 인간은 뭘 믿고 저리 당당한가. 치사는 아니더라도 군말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밥을 얻어먹는 자로서 최소한의 예가 아닐까' 싶은 게 드러나지 않는 속내였다. 공을 모르는 사람 앞에 마음이 고약해지는 건 인지상정이다.

며칠 여행이라도 간다고 하면 보너스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 해방 맞은 시위라도 하듯 만국기 휘날리며 춤인들 못 출까. 소파에 두 다리 쭉 뻗고 드러누워 애꿎은 리모컨과 씨름에 들어간다. 졸리면 자고. 그게 지겨우면 차 한 잔에 여유를 녹여가며 읽고 싶은 책 읽고, 당연히 밥상은 세상에서 제일 편한 군것질로 대신한다. 갓 지은 밥만 원하는 그의 고집이 지겨워 밥 짓는 일은 3일 동안 딱 한 번으로 끝! 천국이 따로 없다.

이상한 것은 그 생활도 이틀 넘기니 지겨웠다. 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입에 단 땜빵식 끼니는 허기를 불러왔고, 전화 한번 없는 그 인간이 괘씸해지기까지 했다. 흐트러진 집안 꼴은 평소 나의 민낯, 자유에도 책임이 따르듯 잔소리 없는 집안은 기강이 풀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그때서야 남편의 잔소리가 삶의 버팀목임을 깨달았다. 밥상에 감초 같은 김치가 혀에 달진 않지만 터줏대감이듯, 내 일상의 중심은 잔소리꾼으로 각인된 남편이었다.

덩그런 거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는 판에 집안에 말 붙일 그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썰렁할까. 평소 등 돌리고 컴퓨터 앞에 앉은 모습이 그리도 싫었는데 오늘따라 든든한 울로 느껴진다. 요 근자에 밥상머리 송사도 꼬리를 내렸다. 요리하는 걸 터부시하던 그가 밥, 김치찌개, 설거지도 곧 잘한다. 괴질에 혼을 빼앗긴 것인가, 아니면 그도 뒤늦게 나의 수고를 알아본 것인가. 국난을 겪으면서 밥투정이 배부른 치기였음을 인식한 것인지도 모를 일, 고난은 성장의 발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전쟁에도 순기능은 있다고 한다. 파리 목숨 끊듯 살상을 저질러 폐허가 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깨우쳤다고 하니, 고통의 의미를 생각해 볼 일이다. 평생 애정을 쏟던 자식도 자기 둥지를 찾아 곁을 떠났고, 부실한 내 곁을 끝까지 지켜줄 사람은 미우나 고우나 옆 지기뿐이다. 

오늘도 사고 한 건을 쳤다. 레인지에 고구마를 올려놓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산에서 돌아온 그의 핵폭탄 잔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집안은 온통 탄 고구마 냄새가 진동한다. 자신이 때맞춰 들어왔기에 망정이지 어쩔 뻔했느냐며 공치사가 등등하다. 힘없는 남편 집안에서라도 호통치게 봐주면 좀 좋을까. 잔소리 들어 싸지 싶으면서도 "요즘 내 또래 여자들은 다 그렇다"며 맞섰다. 실소를 금할 수 없다는 듯 어이없는 표정이다. 사실 난들 이렇게라도 큰소리칠 데가 옆 지기 말고 또 어디 있을까. 

잔소리가 살아난 걸 보니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다. 감사하면서도 절대 고분고분한 법이 없으니 이 아집은 언제 고개를 숙일꼬. 아니다. 자잘한 다툼은 일상의 양념이다. 삶의 평정을 위해서도 계속되어야 한다. 집안에 발이 묶이고서야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제대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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