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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물든 책 보따리

                                                                         천윤우

추억을 새기려거든
장생포 고래 문화마을로 가볼 일이다
역동적 60년대 고래잡이 어촌
교복 대여점엔
푸른 바람이 부풀어 있어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출렁거린다
옛 시간이 팔을 벌리는 교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따뜻해지는 난로,
포개놓은 노란 양은 도시락에서
잃어버린 모정을 읽는다
가난을 겨울옷처럼 껴입고 살던 시절
등굣길은 세상으로 난 통로,
책과 도시락이 허리춤을 꼭 붙든다
교실에 도착하면
붉은 김칫국물이 번진 책 보따리
책갈피에도 도톰하게 단풍물이 들었지
소풍 날엔
김치, 단무지, 시금치, 우엉 속
꼭꼭 눌러 새벽을 말던 울 엄마
엄마 생각에 파문이 일 때면
스치는 사람들이 엄마로 다가왔다가 지워진다

지금은 마을도 엄마도 떠나
내 안에 바람이 불면 고래마을을 찾는다

△천윤우: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6년 아람문학 시 부문 수상. 제18회 국제 지구사랑 특별상 시 수상.
 

이미희 시인
이미희 시인

배꼽시계는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늘 알람을 울렸다. "오늘은 무슨 반찬을 넣었을까, 계란 프라이는 밥 위에 덮어 놨겠지" 양념 묻은 엄마 손을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맛난 생각이 커질수록 시간은 더디 가고 배꼽은 눈치도 없이 오르락내리락 방정을 떨었다. 양푼이 가득 비벼 먹어도 다 차지 않던 뱃구레는 밥이 보약이라 믿으며 고봉밥 담아주던 엄마 처방전 때문일 것이다. 희한하게도 그때는 아파도 밥 잘 먹으면 낫고, 추위를 타도 뜨끈한 쌀밥 한 그릇이면 동장군을 이겨냈다. 엄마가 떠난 뒤 어떠한 처방전도 잘 듣지 않는 건 엄마라는 약 기운이 너무 셌던 까닭이겠지.


이 시는 붉게 물든 책 보따리에서부터 그리움이 밀려든다. 그 보따리를 풀면 물밀 듯이 안겨들 보고픔을 어찌 다 견뎌낼까. 시인은 도시락과 엄마라는 두 단어만으로도 독자의 가슴을 젖게 만든다. 조리할 기구도 재료도 마땅찮던 시절, 엄마들은 가족보다 서너 시간쯤 빨리 일어났다. 익혀낼 불은 하나뿐인데 밥도 하고 찬도 해야 하니 얼마나 시간이 촉박했을까. 까딱하면 김칫 국물이 새어 책을 물들여 놓아도 그것마저 맛깔나던 점심시간. 시인은 푸른 바람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가 엄마의 손길을 더듬는다. 소풍날, 새벽을 꼭꼭 말던 그 엄마는 하늘에서도 온기를 감싸 말고 계실테지.


교복 세대들의 교실은 세상으로 가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입소문으로 듣는 세상 소식은 가장 즐거운 인문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수업 내내 몽롱했던 눈동자도 되살아나고 어느 가수의 연애 소식, 선생님을 좋아하는 고백 등 별것도 아닌 일에 어쩜 깜짝 그렇게도 즐거워했을까. 엄마들은 도시락을 싸면서 잘 뜸든 밥알처럼 자녀들도 잘 익어주길 주문했을 것이다. 스치는 사람마다 엄마로 보이는 시 속 어딘가에 내 엄마도 가득하다. 시인은 꼭 오늘만 같은 오래전 일상을 새날로 그려냈다. 우리들의 교복 안에 보물처럼 살아있는 찰진 도시락과 엄마 엄마를. 이미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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