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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콩밭 더위는 여름 못지않다. 구순의 어머니는 여전히 밭머리에 있다. 온 몸은 연신 흘린 땀으로 옷은 축축했다. 예부터 동백 울타리로 둘러쳐진 큰댁 집터 자리는 더위 나기가 싶지 않은 곳이다. 하필 그곳에 당신은 노구를 끌고 와서 봄 콩 농사를 심었던 게다. 

당신이 좋아하는 싸만코 아이스크림을 건냈다. 섬에 들어서기 전에 사서 단도리를 한다고 아이스백에 넣었는데도 물고기 모양은 온데간데없다. 허겁지겁 먹지 않으면 낭패를 볼게 뻔하다. 아니나 다를까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입으로 가는 것 보다 밭고랑에 흘리는 것이 더 많다. 조짐이 안 좋다. 아이스크림도 다른 딱딱한 음식들과 같이 머잖아 어머니의 기호 식품에서 쫓겨나겠다. 

명분은 당신이 모은 동전으로 사 온 아이스크림이다. 오래전 시골에 와서 가져간 동전주머니는 꽤 오랫동안 차량 캐비넷에서 잠을 잤다. 파우치에 든 동전이 묵직했다. 차에서 동전을 볼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내심 급할 것 없다며 여기며 미뤄왔다. 장소를 불문하고 요즘은 동전 쓸 일이 없다. 그러니 당신이 동전만 생기면 하나씩 모은 것이다. 연로한 당신이 카드를 쓸 일도 없지만 몸이 불편하니 버스를 타고 출입을 하는 일도 없다보니 시나브로 모였다. 지폐로 환전하면 금액이야 얼마 되지 않겠지만 아마도 당신이 오랜 시간 모은 것임이 분명하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정도는 제법 여러 번을 사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폐로 환산하면 그다지 많은 금액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동전 주머니를 꺼내는데 모금함이 눈에 띄었다. 은행 창구 데스크에 쏟으니 양이 제법 된다. 아주 잠깐이지만 지폐로 교환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모금함에 넣기로 했다. 모금함이 수북하게 넘쳤다. 잠깐 동안 마음이 흐뭇했다. 동전을 담았던 빈 봉투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그 가벼움의 의미는 지극히 다의적이나 아무튼 어머니의 무거운 숙제도 해결 한 것 같고 다음에 시골 가는 길에 붕어빵이나 사가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날씨가 따듯해지고 빵을 파는 곳이 눈에 띄지 않아서 아이스크림으로 대신했다.

그때는 동전의 가치가 어마어마했다. 당신이 시장을 다녀온 저녁이면 주머니에서 묵직한  동전을 꺼내 방바닥에 쏟았다. 지폐가 간간히 쓰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동전이 생활 속에서 더 많이 사용되었다. 어머니가 행상에서 돌아올 때면 동전주머니가 몸빼 바지 가랑이에 매달려서 대롱대롱 움직였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출렁이던 주머니는 다리와 다리 사이를 시계추처럼 달랑거려 거추장스러웠을 터인데도 당신을 늘 몸빼 속에 검붉은 주머니를 차고 다녔다. 

어느 날은 팔 물건을 담았던 다라이에 동전이 든 두툼한 주머니가 담겨오기도 했다. 차고 갔던 주머니를 풀어서 담아 보자기를 덮고는 머리에 이고 오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장사가 제법 잘 되었는지 주머니가 묵직했다. 동전은 당신의 삶에서 살아낼 수 있는 에너지였지 싶다.

무더위 속에서 아이스크림은 먹는 속도보다 흘러내리는 속도가 더 빨랐다. 당신이 늙어가는 속도와 별반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얼추 절반은 기어서 완두콩을 딴다. 마음은 저만치 가 있는데 손은 느리다. 나이는 판단력도 무너뜨린다. 늘 해 오던 일이라 잘 할 수 있다고 여겼으리라 아니 올해도 근근이 해 내고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마음 따로 몸 따로 노는 것을 누군들 어쩌겠는가.

지켜보는 나는 더하다. 힘들게 구십 노구를 끌고 다니는 당신을 보는 나는 괴로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지난겨울에는 어지럼증으로 넘어져서 갈비뼈 3개가 금이 갔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런 것쯤은 별로 괴이치 않는 것 같다. 절반은 할 수 있다는 착각이지 싶고 남은 반은 살아있는 증거를 보여주는 오기라 여긴다. 땀도 주체를 못하는지 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는다. 

먼 훗날 시간이 더 흐르고 언젠가 당신이 떠나고 나면 완두콩 한 쪽도 먹지 못하지 싶다. 콩으로 된 밥이 목에 넘어갈 것 같지 않다. 행여 내색이라도 하면 어미는 그냥 천성이 그렇게 생겨먹어서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려니 여기란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살아있는 증거란다. 당신이 밥숟가락을 놓으면 안 하겠지 하며 다시 콩을 딴다. 여전히 콩 따는 손은 느리기만 하다. 어떤 것도 세월을 이기지는 못한다 싶다. 내 손길이 더 빨라져야 하는 이유다.

내 지친 몸도 투덜투덜 콩밭을 적신다. 어머니는 동전을 모으듯 콩을 바구니에 담는다. 꽃피는 아름다운 봄이 아니라 어머니에게는 콩 따는 봄이다. 어서 봄이 지났으면 싶기도 하다. 당신은 내년 봄에도 콩을 따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는 잠에 떠났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시작으로 잠자리에 든다. 당신의 길었던 하루가 또 그렇게 깊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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