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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천동 산 1302번지

                                     엄하경

아버지의 집은 너무 높은 곳에 있었다
골목은 구불텅구불텅 뱀처럼 휘어졌다
숨이 턱에 차도록 올라야 보이는 그 집에서
아버지는 우리 대신 꽃을 키웠나 보다
등나무줄기가 지붕을 감아나가고
철 따라 꽃들은 내력도 없이 피었다 졌다
집에서 내려가는 길을 잃은 아버지 대신
가파른 골목길을 시시포스처럼 오르내리는 동안
나는 그 꽃들의 이름, 한 번도 호명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꽃밭이 무성해질수록 집은 낡아갔고
우리는 사막처럼 건조해졌다
그래서 아버지의 꽃이 될 순 없었나 보다
차례로 식구들은 집을 떠났고
꽃들이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여름 아침엔 꽃대 실한 국화가
홀로 술잔 기울이는 아버지를 지켰다
선거 때마다 나돌았던 공약으로
마침내 철거 계고장이 날아든 봄날
아버지는 맨 먼저 꽃밭을 허물었다
닫아걸었던 내 기억의 문틈 사이로
동백 목련 샐비아 채송화 나팔꽃 줄장미 국화…
그제야 철없이 피어나고 있었다

△엄하경: 본명 엄미경. 부산 출생 2003년 '시사사' 통해 시단에 나옴. 한국작가회의 회원과 경희 사이버 문인 회원으로 활동 중. 시집 '내 안의 무늬'.

도순태 시인
도순태 시인

'너무 높은 곳에 있는' 아버지는 그랬다. 혼자 근엄하고 혼자 바쁜 생이었다. 그래서 자식들은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이었기에 아버지는 외로웠다. 자식은 매일 여름날 옥수수나무처럼 자랐고 아버지는 햇볕에 지친, 주렁주렁 달린 토마토 나무였던 거다. 자식은 몰랐던 거다. 홀로 짊어져야 했던 아버지의 숨 가쁜 세월이 여름 햇살같이 유한일 줄만 알았다. '숨이 턱에 차도록 올라야 보이는 그 집'에서 진정 숨 가쁜 혼자의 시간을 보내시게 될 줄이야.

철마다 피고 지는 꽃으로 위안을 만들어 '집에서 내려가는 길을 잃은 아버지' 끝내 자식에게 다가가는 길도 찾지 못했던 것 같다. 깊은 외로움은 더욱 꽃밭 가꾸기에 열중이었고 자식들의 발걸음은 점점 줄어들었을 것이다. 서로 손을 내밀어볼 골든타임은 멀어지고 결국 자식들은 각자 제 갈 길을 찾아 떠나고 아버지의 낡은 집은 꽃들만 모여 외로운 시간을 버티고 있었는지 모른다. '홀로 술잔 기울이는 아버지를 지켰다'라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다. 그때 더 가까이 다정했더라면, 아버지의 손을 한번이라도 잡았다면 아! 기억 너머의 꽃들을 호명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철거 결정 후 시인의 집은 도시로 나갔을까? 아버지는 혹 아파트 베란다에서도 꽃을 가꾸지나 않았을까? 그리운 아버지여! 뜨거운 태양아래 실한 꽃대의 국화를 기억해 주시길, 시인의 마음을 대신 풀어 놓는다.  도순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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