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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수도의 뿌리를 알리는 울산달천철장 기념시설.
산업수도의 뿌리를 알리는 울산달천철장 기념시설.

# 울산과 일본의 연결고리
울산에서 고대사와 관련한 고고학적 유물들이 잇달아 발견된 이후 가장 충격을 받은 쪽은 일본이었다. 왜곡의 달인들이 일제강점기를 시작으로 엄청난 역사 왜곡작업을 벌였지만 울산에서 쏟아진 구석기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다양한 유적과 유물은 이 모든 것을 헛수고로 만들었다. 문화 열등감에 빠진 일본은 일제강점기 때 한반도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역학사적 만행을 저질렀다.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버금가는 고대 역사서 훼손과 불태우기 작업은 물론 은밀하게 모은 귀중한 사료들은 도쿄로 빼돌려 궁성도서관 수장고 깊숙이 감춰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광개토대왕비의 훼손과 조작으로 임나일본부의 근거를 만든 사실은 조잡한 왜곡의 증좌지만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왜놈들은 왜 그토록 우리 땅 한반도를 뒤지며 자신들의 흔적찾기에 나섰을까. 

일본은 스스로 한반도에 대한 열등의식이 뿌리깊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자각한 민족이다. 이 때문에 어쩌면 스스로가 한국에 역사문화적으로 뒤쳐질 리 없고 잘 뒤지면 자신들의 흔적이 한반도에 있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경주와 부여, 한강 언저리와 전라도 고분군을 뒤지고 다녔다. 이런 과정에서 엄청난 왜곡과 무리수가 터져나왔다. 바로 후지무라 신이치의 석기 유물 조작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세계적으로 손가락질을 당했고 일본 안에서 발굴됐다고 주장하는 고고학적 성과들도 국제적으로 불신 받는 사태에 이르렀다.

참고로 후지무라 사건을 살펴보자. 일본은 2000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주거지 유적을 발굴했다고 대서특필했다. 50만 년 전의 지층에서 전기 구석기 유물이 대거 쏟아져 나왔고 인류 주거역사의 상한선을 10만 년 이상 끌어올린 대발견이었다. 전 세계의 고고학자들이 일본 열도를 주목하며 인류의 뿌리에 대한 학설이 뒤바뀔 무렵 이 사실은 조작으로 드러났다. 발굴의 당사자인 후지무라 신이치는 세상에 이 사실이 알려지기 이미 십수년전부터 자신이 직접 고고학적 유물들을 발굴지에 매장해왔고 이 사실을 한 언론이 폭로했다. 말 그대로 세계를 농락한 희대의 유물조작사건이었다. 

조급한 일본의 학자들은 울산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의 흔적과 환호 주거지가 쏟아져 나오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 벼농사 문화에서 만큼은 자신들의 문화가 우위에있다고 믿었지만  울산 옥현 유적은 입을 다물게 했다. 검단리 환호유적과 연암 집자리 유적은 자신들의 선조가 만든 주거형태의 원형이 중국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건너왔음을 실증적으로 증명했다. 울산은 그들에게 이런 낭패를 안긴 땅이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일제강점기가 지나고 한반도에 공업화의 역사가 시작되자 일본은 또다시 울산에 대한 역사적 우월성을 과시하려고 했다.

바로 이케다라는 자의 울산공업도시 개발계획이다. 울산의 기적이 세계에 알려질 무렵 일본 언론은 울산 공업센터의 원형이 자신들의 저작권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떠들었다. 근거는 일제강점기 이케다 스케타나라는 일본인 기업가의 도시계획 사업이었다. 이케다는 1928년 조선총독부의 승인을 받아 1937년 울산항 축항 및 인구 50만 공업도시 계획 수립을 시작했고, 2차세계대전이 한창인 1943년 5월 11일 지금의 학성공원에서 공업도시개발 기공식까지 가진 인물이다. 당시 상황을 연구한 한삼건 전 울산대 교수는 이케다가 추진하던 울산개발계획을 박정희 정권이 울산공단개발로 이어갔다는 점을 연결하는 연구 성과를 발표한 바 있다. 

문제는 일본의 한 사업가의 안목과 총독부에 있는 일제의 참모들의 안목이 왜 울산을 지목했느냐는 점이다. 이는 울산이 일본으로 가는 문화 전파의 최단거리 지역이라는 특수성도 있지만 오래전 고대로부터 이 땅이 가진 지리 기후학적 입지조건과 연결고리가 있다는 점 또한 중요한 사실이었다. 실제로 울산은 고대로부터 한반도 최초의 공업기지가 만들어진 땅이다. 그 증좌가 바로 철기문화다. 한반도에 수많은 철장이 발견됐고 철기를 다룬 문화의 흔적이 발굴됐지만 철기문화를 국가적인 산업으로 만들고 삼한일통의 대업을 위한 뿌리 산업으로 육성한 지역은 울산이 유일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한반도에 철기문화를 처음 일으킨 지역이 울산이라는 이야기는 근거를 가질 수 있다. 울산은 고대로부터 대규모 채광 유적인 달천 철장(達川 鐵場)이 위치해 철과 철기 생산의 중심지였고 이를 바탕으로 신라에 버금가는 강력한 집단을 형성할 수 있는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울산 사람들은 잘 모르는 일이지만 울산지역 제철 유적은 모두 54곳이나 된다. 이 가운데 구미리 허지기 야철지, 만화리 진애 야철지는 울산사람들이 직접 확인해 당시 대규모 제철 조업이 이루어진 곳임을 증명한 지역이다. 무엇보다 울산지역의 경우 철기 출토 유적이 다양한 지역이다. 출토 유적만 89곳으로 무덤에서부터 건물지, 경작지 등 종합박물관 같은 곳이다. 그 이유는 철기의 역사가 기원전 2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역사성 때문이다. 이는 중국 문헌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후한서에 문서화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문제는 울산에서 발견된 철기문화의 독창성이다. 지금까지 한반도의 철기문화는 중국 한나라 이후 중국대륙에서 유입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울산 달천 철장의 야철장 등 유적 발굴 이후 역사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정도의 철기문화의 이동 경로나 뿌리는 미궁 속으로 빠졌다. 한반도 동남쪽 작은 어촌마을인 울산은 철을 발견한 부족과 그 문화를 전수받은 부족들이 들어와 새로운 철의 왕국을 만들었다. 6개의 작은 족장들로 구성된 사로국이 신라라는 이름의 고대국가로 발전하고 이들이 결국 삼국통일을 통해 한반도 세력의 중심에 선 것도 따지고 보면 달천철장이 중심이다. 

궁금한 것은 달천철장을 발견한 세력과 그들의 뿌리는 어디인가에 있지만 여전히 이와 관련된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유사 등 현존하는 기록에 근거하면 달천철장의 뿌리는 신라를 이끈 석탈해계로부터 시작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석탈해다. 탈해왕으로 불리는 석탈해는 반구대암각화에서 시작되는 인류의 이동경로와 해양문화와 대륙문화의 연결고리를 확인해 주는 놀라운 증좌다. 기록을 보자. 석탈해는 단야족(鍛冶族)이라고 했는데 단야족은 야철세력을 의미한다. 석탈해는 철기술을 바탕으로 서라벌에 입성해 왕이 됐는데 그 철은 바로 이 울산의 달천철장의 철이다. 이는 최근 달천철장 일원에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단야족의 유구로도 확인되고 있다. 

석탈해는 도대체 어디서 나타나 한반도에 철기문화를 전달했을까. 이 문제는 아직 명확한 규명이 되지 않고 있다. 고대사의 대부분이 명확한 사실의 기록보다는 모호한 신화나 설화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기에 이를 풀이하는 학자들의 그들 나름의 잣대로 역사를 해석하기 때문에 다양한 학설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중 유력한 설이 석탈해의 북방유입설이다. 흉노의 후예인 석탈해가 왕실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알에서 출생했다는 이유로 왕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상자에 실린 채 한반도 동남부에 표착했다는 설화가 그 근거다. 난생설화는 대부분 북방민족을 이끈 영웅들의 출생담이다. 북방민족에 난생설화가 많은 것은 그들이 태양의 후예, 하늘의 자손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북방민족 대부분은 태양을 신표로 하고 태양 가까이 있는 새를 신물로 여겼다. 

고구려의 삼족오나 알타이, 스키타이 문화의 새문양도 여기서 비롯된다. 결국 석탈해도 북방민족의 후예로 신라 땅에 들어와 그들이 사용했던 철기문화를 활용할 수 있는 울산 달천을 그 근거지로 삼은 셈이다. 놀라운 것은 석탈해식 난생설화는 시베리아 동단, 캄차카반도부터 유라시아 중심, 알타이를 거쳐 훈족의 말발굽이 닿던 동유럽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결국 초기 신라 왕국의 지배계층이 광활한 대륙의 후예들로 그들의 철 제련술과 철제 무기가 왕국의 튼튼한 뒷배가 됐다. 그 증좌는 셀 수없이 많다. 고고학과 인류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청동기 시대부터 시베리아 동북쪽 해안에서 한반도 해안에 이르는 해안길은 무수한 문화적 증거를 남기고 있다.

암각화는 대표적인 그들의 표식이다. 해안을 중심으로 이동했던 무리들은 북쪽의 연해주와 캄차카, 그리고 알래스카를 넘어 북미대륙으로 진출했다는 설은 이미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그 문화 유전인자의 족적이 암각화와 청동기, 철제 도구들로 오늘의 인류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 이 같은 엄청난 땅의 역사가 일제의 상업적 촉수를 자극해 공업센터 구상까지 이어진 셈이다. 결국 박정희 시대에 시작된 울산공업센터의 역사는 2,000년이 넘는 고대사의 뿌리와 한민족의 이동경로와 연결된 문화인류학적 자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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