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가까운 시간, 손가방에 동시집을 챙겨 강으로 나간다. 새로 생긴 오산대교를 넘어 달맞이꽃 소녀들에게 들를 계획으로. 달을 기다리느라 기린만큼 목이 길어진 소녀들이 노란 속눈썹을 깜빡이며 아는 체를 한다. "오늘밤에도 왔네요. 그 손가방에 든 것 동시집 맞죠? 아, 김륭 시인, 우리처럼 달과 사랑에 빠진 시인이죠? '해바라기' 무지 좋아하는데 들려줄 수 있나요?" 소녀들 재촉에 못 이겨 '엄마의 법칙'을 펼친다.
제아무리 키가 크다고는 하지만 해바라기도 어쩔 수 없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제 키보다 높은 곳에
그 마음을 올려놓아야 한다.
그 애가 사는 집 담벼락 위에 얹어 놓은 내 마음처럼
해바라기도 밤새 머리를 하늘로 밀어 올리다가
꽁, 달에 머리를 찧은 게 틀림없다.
달빛 아래, 달개비 몇 송이 키득키득 웃으며
올려다보는 해바라기 얼굴이
노랗게 익었다. -'해바라기' 전문
"아앙, 다시 들어도 좋아!" 감탄사를 터뜨리는 소녀들. 그믐이라 못 오고, 비 때문에 못 오고, 안개 때문에 못 오고, 못 오는 핑계도 갖가지인 달을 꾹 믿고 기다리는 소녀 사랑꾼들을 이번에는 엉엉 울려보려 한다. '여름한밤 강둑에 나와선 달맞이꽃 소녀들이 진짜 기다리는 건 달이 아니라 달나라로 떠난 엄마가 아닐까? 아빠가 아닐까?' 하는 연민에 살짝 빠지기도 하며 '엄마 생각-달밤'을 들려준다.
밤은 밤인데, 달이 밤을 다 갈아엎어 꽃밭으로 만들어
놓는 밤 달에서 방아 찧던 토끼들이 내 잠을 풀처럼 뜯어
먹는 밤 하늘나라로 간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 한 방울
톡, 떨어뜨리면 반달곰 몇 마리 물고기 잡으러 올 것 같은
밤 아빠가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밤은 밤인데, 지구 반대편 코끼리들이 퐁당퐁당 개구리헤엄을 치며 내 방으로 건너올 것 같은 밤
내일은 지각하면 안 되는데,
엄마한테 혼나는데, -'엄마 생각-달밤' 전문
엄마를 잃어보지 않은 나 같은 어른이야 죽었다 깨도 모를 슬픔을 달맞이꽃 소녀들은 잘도 이해한다. 톡, 한 방울로 시작된 눈물은 강물이 되어 반달곰과 코끼리를 첨벙첨벙 불러오고 만다. '제2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대상'의 주인공 ≪엄마의 법칙≫으로 무더위를 이겨보시라 강추한다. 환상세계에서 언제쯤 건너올지 가늠이 안 되는 김륭 아이의 동시 모험은 2020년에도 계속 된다.
나는 손이 없어 나를 꼭 껴안아 줄 수는 없지만/새로 태어날 수는 있습니다.//
추운 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나는 발이 없지만 걸어서 왔습니다.//
하늘을 꼭꼭 밟고 왔습니다. -'눈사람' 전문
달과 눈사람 없이는 김륭 시인의 동시를 말할 수 없습니다. 달에서 눈사람을 데리고 우리 곁으로 오는 시인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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