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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환해 전 언론인·영어번역작가
박환해 전 언론인·영어번역작가

내년 3월 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 예비후보들 간 해묵은 이념 전쟁이 또다시 예고되고 있다. 특히 여당의 명분인 '정권 재창출'과 야당이 외치는 '정권 교체'라는 화두가 이들 두 진영을 애태우고 있다.

으레 정권 말기가 되면 집권당과 청와대는 이 프레임의 족쇄에 갇히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게 상례다. 그런데 여당 후보 이재명 진영은 최근 불거진 대장동 게이트 등 자신을 둘러싼 갖은 악재에도 오히려 의기양양하다. 반면 야당 후보군은 내부 총질로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형국이니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지난 2012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 주도로 만들어진 동영상 '백년전쟁'이 논란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거두절미하고 '백년전쟁' 동영상은 애시당초 이승만을 '친일파' '하와이 깡패'로, 박정희를 '스네이크 박' '미국의 하수인'으로 조롱했다. 이승만을 하와이에서 불륜이나 저지른 '불한당'에 비유했고, 박정희의 수출주도형 발전 전략은 미국의 구상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움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했다.

게다가 '백년전쟁'은 한국 현대사 100년을 친일·협력 세력과 독립·저항 세력의 전쟁이라는 이분법으로 몰고 갔다. 친일 세력이 세우고 만든 대한민국이니 정통성이란 게 있을 리 없다는 얘기였다. 이 동영상은 "북한은 친일파 숙청을 완성했고, 남한은 실패했다"며 지난 80년대 대학가를 휩쓴 '거짓 신화'를 바탕에 깔고 있다.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키고, 발전시켜 온 주역들을 악의적으로 비난하는듯한 '백년전쟁'은 그들이 사용하는 '전쟁'이란 표현에서 드러나듯 사실상 대한민국에 대한 선전포고다. 한 나라의 존재 자체를 파괴하려는 이런 움직임을 방치하면 국가 정체성의 혼란을 넘어 아직 판단 능력이 없는 우리 자식 세대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 심히 우려된다.

좌파 역사학자나 과거 운동권 세력이 우리 현대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들은 70~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해 근본적으로 공부할 시기를 놓쳤다고 본다. 거대한 '지적 공백'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깊이 있는 연구가 아니라 구 소련에서 조차 스탈린 사후에 폐기·처분된 교조적인 지식을 팸플릿 형식으로 배우고 그것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됐다. 그리고 역사학계, 특히 국사학계가 현대사 연구를 외면한 것이 이런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생각이다.

최정호 전 연세대 교수는 지난 80년대 초에 쓴 글에서 "이미 학자들이 우리 현대사를 다루지 않는 것은 책임방기며, 그 공백을 정치적 목적이 있는 세력이 이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이후의 상황은 그런 경고가 놀랄 만큼 예언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형성된 386세대(현 586세대)가 교수·교사·교과서 필자가 되면서 그들의 왜곡된 역사 인식이 확대 재생산되고 말았다. 마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격이다. 지난 90년대 초 소련을 비롯한 동구라파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도 그런 경향은 소멸하지 않고 강화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광복 이후 우리 학자나 지식인이 마르크스주의에 기울어진 것은 한편으로 이해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당시에는 소련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망 뒤 스탈린 체제의 실체가 드러난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소련이 비스탈린화의 길을 걸은 것과 달리 북한은 전체주의 체제를 고집하며 주체사상으로 거침없이 달려갔다. 게다가 한국의 좌파는 소련이 개혁개방 과정에 들어간 90년대 이후에도 예전의 관점을 버리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세계사적인 공산주의 몰락과 한국의 민주화가 비슷한 시기에 이뤄진 것은 불행한 조합이었다. 때마침 정권을 잡게 된 현 정권과 운동권 세력은 통일을 새로운 목표로 설정하고 북한에 대한 비판을 '색깔론'으로 역공격하면서 공산주의 소멸이라는 세계사의 흐름과 거꾸로 가는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백년전쟁'은 역사 '다큐'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히 편향적이다. 터무니없는 악선전이 먹혀드는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 학교에서의 역사교육이 지나치게 좌편향된 탓이고 본다. 또한 세계사적인 시각을 결여하고 있는 것도 맹점 중의 하나다. 우리는 우리 역사를 보다 '글로벌'한 흐름 속에서 넓고 깊게 이해하도록 학생들을 가르치지 못했다. 그 결과 우리의 역사인식은 역사를 '선'과 '악'의 이분법적 대결로 보는 매우 단편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이 시점에서 내년 대선이 현 정권의 이념 완성이냐, 아니면 또 다른 세력의 저항이냐가 관건이 될 것으로 예상돼 귀추가 주목된다. 민주주의에서 아무리 언론의 자유가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해도 국가를 망치는 자유와 인격살인의 자유까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의무없는 자유, 책임없는 자유는 지옥에서도 허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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