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 위의 발레리나
자판 위의 발레리나
  • 정영숙
  • 2022.02.10 19:49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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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읽는 금요일] 정영숙 수필가
정영숙 수필가
정영숙 수필가

객석에 앉자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었다. 건반 위를 거침없이 누비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마치 발레리나의 춤사위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밝고 경쾌하던 곡이 카리스마 넘치는 묵직한 선율로 변하기도 하고, 깊은 시름을 토해내는 탄식이 되기도 했다. 종종걸음으로 숨차게 내달리다가는 어느 순간 느리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가슴을 파고들었다. 

전율이 일어날 것만 같은 그의 연주를 자세히 듣고 볼 수 있었던 것은 R석에 배정된 좌석 덕분이었다. 자리가 앞에서 네 번째 줄 중앙인데다 연주자와는 대각선 방향이라 섬세한 손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건반 위에서 종횡무진하는 그의 손가락이 마치 발레리나가 춤을 추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흐트러짐 없는 절제 속에서도 자유롭게 건반을 누비고 있어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드미트리 마슬레예프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심사위원단 만장일치로 우승한 실력파 피아니스트이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 루마니아 등 유럽 전역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독보적 월드 스타인 그의 연주에는 폭발적인 카리스마와 뜨거운 열정이 녹아 있다. 태풍처럼 강하게 휘몰아치다가 아지랑이처럼 야울거리며 여려지는 연주에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이미 수많은 연주회와 협연에서 인정받았던 그가 만들어 낸 선율에는 심금을 울리는 마력이 있었다.

피아노 연주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기까지 그는 수많은 시간 동안 연습에 연습을 더했을 터다.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과 마주하여 고뇌에 빠지기도 했을 것이고, 가끔은 만족스럽지 않은 자신의 실력에 주눅 들었을지도 모른다. 힘든 시간을 견디며 각고의 노력했기에 훌륭한 연주자가 될 수 있었고, 수많은 관객을 매료시킬 수 있었으리라. 세상에 그저 주어지는 것은 없다. 무수히 많은 음악 애호가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그가 부러웠고, 한편으로는 대단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과 환경은 다르지만 자신을 가꾸고 다듬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누구나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어도 그게 그리 만만하지 않다. 우리는 각자의 짐을 지고 인생길을 걷는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무게의 짐을 지고 걷는 것은 아니다. 한 발도 내딛지 못할 만큼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도 있고, 깃털처럼 가벼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감내한 짐의 무게만큼 그 사람의 삶도 깊어질 것이다. 그 힘든 시간이 농익어 삶의 깊은 맛을 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버거운 삶이라 해서 그리 절망할 일은 아닐 수도 있겠다. 

돌아보니 나도 어느새 아득히 먼 길을 걸어왔구나 싶다. 비록 빛나지도 않고, 자랑할 것도 없는 삶이지만 매사에 최선을 다했다며 위로해 본다. 글이 제대로 써지지 않아 최선이라는 말 앞에 움츠릴 때가 많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그리 욕심내지 않을 여유가 생겼다. 노력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옅어졌다. 앞으로 남아 있는 나의 시간이 시름 한 움큼, 외로움 한 움큼으로 채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화양연화 같은 시간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든 순응하며 살아갈 용기만 있다면 일희일비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드미트리 마슬레예프의 연주가 막바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동작을 멈추는가 싶더니 다시 열정 넘치는 모습으로 건반을 두드리며 곡을 이어갔다. 화려한 레퍼토리와 서정성, 그리고 자연스러움이 넘치는 그의 연주가 끝났다. 관객들의 끝없는 환호가 이어졌다. 환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건반 위의 발레리나가 되어 춤추던 그의 손가락을 가만히 그려보았다. 발레리나들이 만들어 낸 선율은 오직 아름답다는 말로만 표현이 가능할 것 같았다.

사람들의 뒤를 따라 공연장을 빠져나와 커피 한잔을 들고 공원 벤치에 앉았다.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곡이 들려오는 것 같다. 드미트리 마슬레예프의 손가락이 건반 위의 발레리나라면 나의 손가락은 자판 위의 발레리나가 되어 세상을 위로하는 춤을 추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나의 춤에 공감할 수 있다면 더없는 기쁨이겠다. 헛된 노력은 없을 터, 사람들의 가슴 울리는 한 줄의 글을 위해 나의 시간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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