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꿈
나비의 꿈
  • 이상수
  • 2022.03.3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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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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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 수필가

나비 한 마리 벽에 붙어있다. 바람 따라 팔랑팔랑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한다. 하얀 소매 펄럭이며 승무를 추는 것도 같고 합죽선摺扇을 접었다 펼치는 것 같기도 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나비가 아니라 '주말농장 임대'라 적힌 종이쪽이었다. 일요일 아침, 산을 오르는 초입에서였다. 
 제각기 개성을 뽐내며 놓인 몇 개의 농막 중에서 그나마 반듯한 벽에서 발견하였다. 걸음을 멈추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기록된 정보라고는 휴대폰 번호뿐이었다.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정보를 읽으려 애쓰는 사이 붙임성 좋은 남편은 그 장소를 찾아냈을 뿐 아니라 주인과도 이미 인사를 트고 난 뒤였다. 

 당장 구두 계약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1,200평 밭에서 10평 정도를 원했고 임대료는 책정하지 않았다. 우선 지어보라며 밭 가장자리에 이리저리 놓여있는 삽과 괭이며 호미 등 농기구를 해어주었다. 퇴비와 비료는 빌려 쓰고 나중에 정산하기로 했다. 예기치 않았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등산하려던 계획은 급히 수정되었다. 일단 마음먹으면 머뭇거리지 않는 남편은 벌써 배낭을 벗고 호미를 들었다. 주인 아주머니의 조언대로 밑 비료를 뿌리고 묵정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퇴비를 뿌리고 잘 섞어 두둑한 이랑을 네 개나 만들었다. 하나를 남기고 나머지 세 군데는 잡초를 방지하기 위해 검은 비닐을 씌웠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정상에서 먹을 예정이었던 도시락을 꺼내 밭둑에 앉았을 땐 오래된 농사꾼이 된 기분이었다. 밥을 먹으며 우리는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장 안쪽 이랑에는 오이고추와 청양고추를 반반 심어야지. 뚝뚝 따 된장에 찍어도 먹고 바글바글 강된장에 넣고 끓여 보리밥에 비벼 먹어야지. 다음 이랑엔 오이를 심어 넝쿨을 올려야지. 오이무침도 하고 채 썰어 냉국도 끓여야지. 마지막 남은 이랑엔 가지와 고구마도 심어야지. 우리의 농사계획은 실로 완벽한 것이었고 원미동에서 마지막 땅을 지키는 강 노인이나 서울 빌딩 숲 사이에서 농사짓는 마지막 농부쯤 되는 심정이었다.

 먹는 둥 마는 둥 끼니를 해결하고 시장 입구에 있는 작은 종묘상으로 달려갔다. 감자를 심기에는 시기가 좀 늦었기에 우선 잎채소만 파종하기로 했다. 상추와 쑥갓 그리고 부추씨앗을 구매했다. 얕게 골을 내고 씨앗을 살짝 묻은 후 물을 충분히 뿌렸다. 며칠 지나면 골 지어 어린 싹들이 눈부시게 올라올 것이다. 혼자 먹기에는 분명히 양이 많을 것이므로 지인들과 골고루 나누어 먹으리라. 그 생각을 하니 호미 쥔 팔에 저절로 힘이 올랐다. 부추는 싹이 나면 가을에 다시 모종을 옮겨심기로 하고 고단하지만 뿌듯한 몸으로 집에 돌아왔다. 

 이튿날, 동이 트자마자 밭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인지 출입구에 빗장이 걸려있었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어제의 친절하던 목소리완 사뭇 달랐다. 퇴비랑 비닐을 너무 많이 써버려 본인이 사용할 양이 없다며 임대는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아무리 구두로 한 계약이었지만 하룻밤에 계약을 번복해버린 아주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부부는 손에든 사탕을 뺏긴 어린아이처럼 속상했다. 집 없는 사람이 겪는 설움이 이럴까? 남편과 내가 원한 것은 그저 작은 텃밭일 뿐인데 그것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좀 서글퍼졌다. 

 삭막한 회색빛 도시인들은 정기적으로 푸른 수혈을 받으려 너도나도 텃밭을 꿈꾼다. 고향이 시골인 우리 부부도 늘 자그마한 텃밭 일구기가 소원이었다.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어 화분에 심어진 화초처럼 마음이 메말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땀 흘려 땅을 파고 고향의 기억을 끌어와 축 처진 어깨를 곧추세우고 싶었으리라. 나는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생명을 기르는 소중한 경험을 다시 해보고 싶었다. 

 주인 아주머니의 마음을 헤아려보려 애썼다. 처음 보는 낯선 부부가 갑작스레 찾아왔고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만의 공간에 자주 드나들게 될 일이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퇴비와 비닐을 한꺼번에 써버리는 것으로 보아 농사를 제대로 못 지으리라 생각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차근차근 가르쳐주고 배우다 보면 우리도 잘 할 수 있을 텐데 기회를 주지 않은 그녀가 못내 서운했다. 

 농막에 붙은 종이쪽지가 보이지 않았다. 장자가 낮잠을 자다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처럼 우리는 이틀 동안 농부의 꿈을 꾸었다. 원하던 텃밭을 가지게 되었다며 기뻐했지만 그 꿈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처음부터 내가 가진 것이 아니었으니 손이 비었다고 애석해할 일은 아니다 싶다가도 왠지 마음 한켠이 허전했다. 하지만 삶이 어차피 희망과 절망 사이 줄다리기라면 언젠가는 텃밭을 가질 날이 오리라.
 나비 한 마리 눈앞에서 날아다닌다. 눈부신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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