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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상운산에서 바라본 쌀바위(가운데)와 가지산 정상. 울산환경운동연합 제공
영남알프스 상운산에서 바라본 쌀바위(가운데)와 가지산 정상. 울산환경운동연합 제공

겨울 가지산 출정이다. 가지산 자락에서 매일 아침 눈을 뜨는데도 그 산머리는 눈요기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한 발 한 발 찾아 오른 이에게만 봉우리를 내어주리라, 산중 깊은 곳에서 부른다. 등산 초보 아니랄까 봐 이왕 가는 길, 나목이 빽빽한 숲길로 들어설 요량을 해본다. '영남알프스 9봉 완등' 6봉 인증에 도전하는 남편을 며칠 전에 세르파로 고용했다. 저 설산 등반을 위해서는 그의 발뒤꿈치에 의탁할밖에. 그나마 운문령 코스가 제격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의지만 앞선 저질 체력을 감안한 모양이다.

   어젯밤 늦게야 찜하고 새벽에 급배송 받은 등산스틱을 짚어보니 장딴지가 빵빵해진다. 덕분에 네 다리로 걷는 '사람동물' 신세는 면하리라. 궁근정삼거리를 지나자 불쑥 다가서는 봉우리. 햇살에 마구 찔리기 전에 산자락을 타고 오르는 까치 날개에다, 정상에서 스틱을 치켜들고 까치처럼 나는 '인증샷' 소망을 얹어본다. 운문로를 따라 운문령 옛길을 휘돌아 오른다. 문복산(1,014m), 가지산(1,240m), 운문산(1,188m)을 낀 산모롱이에선 뻑적지근하게 귓속이 차오른다. 지나는 구름이 산허리를 못 넘고 구름문을 이룬다 하여 운문령이다. 시 한 줄기가 구름문을 두드린다. 

 

'소처럼 산을 끌고 준령을 넘고 있다// 바람은 허옇게 등을 연신 쓰다듬으며' - '산정운무'를 퇴고하는 시인의 자판 두드리는 소리도 들려온다, 타닥타닥….

가지산 정상석에서 인증샷 찍는 등산객.  김동균기자 justgo999@
가지산 정상석에서 인증샷 찍는 등산객. 김동균기자 justgo999@

# 흰 구름도 학도 걸터앉아 쉬다 가는 쌀바위
 '울산 12경 가지산 사계' 푯말 주변은 이미 주차장이 되었다.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과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이 얇은 도로표지판 하나로 도명을 달리한다. 산어귀에 귀바위 2.5km, 쌀바위 3.5km, 정상 4.8km 방향 표지판이 낡은 말뚝을 꽉 붙들고 있다. 임도와 숲길을 번갈아 걷다가 만난 널찍한 삼거리. 분홍철쭉 봄·초록산 여름·단풍가을·설산 겨울 뚜렷한 가지산 사계 사진과 입체등산로 사진이 눈을 끈다. 겨우 400m 오른 곳에서 망설인다. 넓은 길로 갈까, 좁은 길로 갈까. 시간을 두고 벌이는 분별심이 가파른 오솔길로 발을 들인다. 산비탈의 긴 나무그림자와 바싹한 갈잎을 밟으며 한참을 헉헉대니 쌀바위행 임도가 나타난다. 귀바위와 상운산을 거쳐 가는 좁은 산길로 초로의 한 여인이 든다. 세 청년이 산책이라도 나온 듯 와그작와그작 아침 서리를 밟으며 지나간다. 왼편에 나타난 쌀바위와 가지산 정상이 사뭇 도도하다. 능선 위로 우뚝한 귀바위엔 피라미드 모양의 돌탑이 파란 하늘 깊숙이 꼭대기를 빠뜨리고 있다. 귀바위는 암벽등반의 최적지로 소문나 있다. 


 나는 갓길의 바위에다 나만의 낮은 돌탑을 쌓았다. 자갈길이 끝난 나무데크에선 떠들썩한 가족들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다시 숨을 밭으며 한참을 오른다. 쌀바위(1,114m)가 거대한 쌀 두 알로 서 있다. 부처가 내려준 바위틈 쌀로 끼니를 해결한 도승과 불자들은 몇이나 성불했을까. 가난한 마을 사람들이 파헤친 바위 구멍 아래엔 커다란 물통이 놓여 있다. "캬아, 시워언하다!" 쌀바위가 흔들릴 듯한 한 중년의 목축임 포효 끝에서 또 다른 자판이 타닥거린다.

5월말 가지산 능선을 붉게 물들인 철쭉. 울산신문 자료사진
5월말 가지산 능선을 붉게 물들인 철쭉. 울산신문 자료사진

'뚝 멈춘 바위 위에/ 구름도 걸터앉는// 그 둘레 언양 땅을/ 병풍으로 펼쳐놓고// 북서풍/ 요란한 밤에/ 학이 날아오른다' 
 -임 석 시인의 '가지산 쌀바위' 시구


# 내가 앉은 여기,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이 천상
남편과 나는 쌀바위 언덕배기에서 배를 붙잡아야 했다. 낱말의 힘에 생리가 작용한다. 배낭에 라면과 쌀밥이 있다. 컵라면을 더운물로 불린다. 햇반을 빠뜨린다. 국물이 매콤한 라면밥 완성이다. 흰 구름도 학도 걸터앉는 곳의 즉석 끼니가 감칠맛이다. 커피로 입가심을 하니 가지산도 식후경이다. 쟤들은 뭐 하는 거지 남녀 한 쌍이 데크 쉼터에서 널따란 비닐을 편다. 스틱 네 개를 기둥으로 꽂으니 뚝딱, 집 한 채가 펄럭인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집에 든 둘이 묵직해 보이는 배낭을 푼다. 덩달아 나는 낙엽 쌓인 오솔길에 배낭을 내려놓는다. 관목이 줄지어 선 산머리의 광경이 이마에 닿는다. 산정에 웬 나무들이 줄을 섰나, 생각하는 순간 인증샷을 찍는 사람 줄이라는 남편의 말. '산멍'이 달아난다. 배낭을 멘 좁은 어깨를 부추기자 보폭이 빨라진다. 가파른 바윗길과 계단길은 자꾸만 이어지고, 어디서 '하늘멍'이나 했으면 싶었을 때다. 


 "아이코!" 하산길의 아가씨가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녀와 거의 동시에 발밑을 보니 흙에 덮인 얼음길이다. 새벽 배송 등산스틱이 그저 고맙다. 대여섯 살 소녀 둘이 아버지를 따라 얼음이 꽝꽝 언 바윗길을 내려온다. "우와 짱! 큰 인물 되겠네!" 작은애를 안다가 내려놓다가를 반복하던 아이 아빠가, 하하 웃는 우리에게 쑥스럽게 답례하곤 비탈을 살핀다. 문득 우리 둘째가 네 살이었을 적 기억이 난다. 아이가 보채는 통에 정상에는 못 오르고 쌀바위에서 하산했다. 비탈이 무서웠는지 내 등에 업혀야만 울음을 그쳤다. 손바닥만 한 아이의 엉덩이 무게가 10킬로, 20킬로… 점점 불어났다. 하오의 햇살에 분홍철쭉이 현란하던 그날.


 푸른 조릿대밭을 지나,구석구석 얼어붙은 눈밭을 지나, 헐떡임을 붙들어주는 로프길을 지난다. 한 시간여 전 라면밥이 부추긴 기운으로 무릎을 높이 들어 나무계단을 오른다.여기저기 웅성거리는 소리들. 부신 해를 배경으로 서거나 앉은 사람들. 뻥 눈앞이 트인다. 가지산 표지석 앞이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초원인 듯 바위산의 최고봉을 빙글빙글 도는 남편의 인증샷을 찍어준다. 멀리 가까이 거칠 것 없는 능선과 봉우리가 파란 물결로 밀려오고 밀려간다. 하늘과 맞닿은 저곳은 지평선인지 수평선인지 운평선인지. 편편한 바위에 앉아 등산화를 벗으니 찬 기운이 발바닥을 녹인다. 네 시간여의 피로는 산비탈로 까마득히 굴러갔다. 식어가는 커피잔을 들고 이 산 저 산을 가늠해 본다. 산중을 제 맘껏 비행하는 매의 날갯짓이 신령스럽다. 얼음골에서 오르는 케이블카 라인이 햇살에 반짝인다. 내가 앉은 여기, 우리가 바라보는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천상이려니. 이곳에선 텅 빈 호흡만이 소용일 뿐.
 


화폭 한쪽 다 비워 둔 채 화공은 어디 갔나// 몇 개의 뾰족 산만 그리다 만 붓질 끝에// 새들은 산을 빠져나와 어디론가 날아가고// 여백이 많을수록 외려 더 넉넉한 품// 낙관보다 더 선명한 얼음장 밑 물소리가// 엄동의 눈보라를 끌며 또 굽이를 흘러가고  
 -운문령을 함께 오른 이서원 '겨울산' 전문

 

쌀바위에 찾아온 봄 정취. 김동균기자 justgo999@
쌀바위에 찾아온 봄 정취. 김동균기자 justgo999@

 

# 정상에 서서 내려다보는 멋…후후 불어먹는 컵라면까지
타닥타닥…. 한 무리의 여성이 라면을 먹는 가지산장 너머로 운문산이 솟구쳐 있다. 산 아래서 보면 가지산과 쌍둥이 같은 또 다른 존재. 남편의 호기가 발동된다. "저기에 들렀다가 내려갈까?" 분명 내게 물었는데 대답은 다른 데서 들려온다. "하이고야, 지금이 세 신데 저그꺼정 간다고요? 가까워 보여도 10킬로 거리에다가 두 시간이 걸려요. 저물어서 안 됩니대이." 곁에서 사과를 베어먹던 노익장의 한마디에 호기심은 금세 기가 꺾인다. 산장 너머의 산도 사막의 오아시스도 시간의 신기루일 따름이다. 백운산, 고헌산, 묵장산, 치술령, 문수산, 밝얼산, 배내봉, 신불산, 간월산, 영축산, 신어산, 재약산, 천황산, 화악산, 사자봉, 억산, 죽바우등…. 이곳을 둘러싼 온갖 산을 스마트폰에서 호명하는 중에 남편이 짐을 싼다. 대한민국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삼양리 산 1-4. 천상의 주소지에서 겨우 한 시간 머물렀건만. 운문산과 석남터널 하산길에도 몇몇 뒷모습이 보인다. 가지산 내력은 읊고 떠나자며 남편을 붙들었다. 


  가지산은 태백산맥의 남쪽 자락으로 석남산, 천화산, 실혜산, 석민산 등으로 불렸다. 신라 흥덕왕 (826~836년) 때 전라남도 보림사의 가지산서 스님이 산자락에 석남사를 지은 후 가지산이 되었다. 동쪽의 태화강, 북서쪽의 무적천, 남쪽의 산내천 상류다. 초여름에 얼음이 얼어 처서 이후에 녹는 시례빙곡(얼음골), 구연폭포, 호박소가 유명하다…(중략). 

 

# 산의 품에 안겨 좋아하는 계절 만끽해보자
암산(女山)인 가지산과 운문산에서 수도승이 깨달음을 얻으면, 홀연 나타난 여자로 인해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된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래서 석남사, 운문사, 대비사는 비구니전문수도장이다. 가지산 능선에 눈이 쌓이면 알프스의 경관을 보는 듯해 영남알프스라 부른다.

김려원 시인 <br>​​​​​​​climbkbs@hanmail.net
김려원 시인
climbkbs@hanmail.net

 울주군이 2019년부터 시작한 '영남알프스  9봉인증사업'은 전국의 등산객을 불러모으고 있다. 하산길의 쌀바위 앞에서 만난 김미성 씨는 2년째 영남알프스 9봉 도전 중이란다. "작년 봄에는 석남터널 코스로 가지산을 올랐어요. 첫 산행에다가 팀을 따라가느라 너무 힘들어 땅만 쳐다보았지요. 이번엔 즐기면서 오르내리게 되네요. 산은 중독성이 있어요. 다녀보니 산이 자꾸만 불러요. 정상에 서서 내려다보는 멋, 정상에서 불어먹는 컵라면과 커피 맛, 그런 건 아무 때나 느끼는 게 아니잖아요." 쌀바위 앞의 색바랜 울산 12경 입간판에 가지산 사계 자연 교향곡 4악장이 흐른다. '좋아하는 계절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당신은 어떤 계절을 좋아하시나요. 대답이 망설여진다면 이곳에서 찾아보세요. 오래 기다리던 봄이 오고 있어요.'

 

  한 발 한 발 내딛어야만 산꼭대기에도 오르고 따듯한 집안에도 들 수 있다. 배낭 하나 메고 무심히 걸어가는 길. 나는 아직 산의 품에 안겨 있다. 겨울 가지산의 백미는 상고대를 만나는 일이라는데. 아차, 스틱 들고 날아가는 '까치비행' 사진 안 찍었네! 김려원 시인 climbkb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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