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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고연리 반계마을 운흥골을 지나 정족산 동쪽 골짜기에 자리한 운흥사 절터(울산시 기념물 제43호).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고연리 반계마을 운흥골을 지나 정족산 동쪽 골짜기에 자리한 운흥사 절터(울산시 기념물 제43호).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운흥사(雲興寺)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세운 사찰이다. 사라지고 없는 운흥사 절터를 찾아 나섰다. 울주군 웅촌면 춘해보건대학교 정문을 지나 고연공단에 들어서면 도로를 따라 빼곡히 공장들이 늘어 서있다. 절터가 있다는 가마솥 형상의 정족산(鼎足山) 아래 운흥계곡을 가기 위해선 먼저 김해김씨 세거지(世居地)인 반계마을을 거쳐야 했다. 

 

마을 입구의 수령 400년 된 갈참나무. 김동균기자 justgo999@
마을 입구의 수령 400년 된 갈참나무. 김동균기자 justgo999@

 마을에 들어서면 수령 400년이 된 갈참나무가 우뚝 솟은듯 서있다. 시골집 아담한 돌담길은 차 한대 겨우 지날수 있는 좁고 구부러진 미로길 같다. 대체 어디에 절터가 있는지 막연해 할때쯤 시적사(施寂寺) 입구가 보인다. 이 절에 조선시대 승탑인 운흥사 승탑 6기 중 2기가 있으나 실제 운흥사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계곡에 널브러져 있던 것을 사찰 관계자들이 모아 현재 위치에 세웠다 한다. 시적사에 잠시 머물다 더 좁아지는 산길을 따라 운흥사 자취를 찾아 계속 올랐다. 

  거친 물소리가 나는 곳에 이르면 '운흥사'라 쓰인 돌 표지석이 반갑게 맞아 준다. 첩첩산중에 들어선듯하다. 돌로 잘 다듬어진 계곡 물길은 매우 크고 가팔랐다. 반계저수지로 흘러내리는 물길 양옆으로 대나무와 산죽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계곡 인근 돌에 '운홍동천(雲興洞天)' '홍류동문(紅流洞門)'이란 글자를 새겼다고 하나 아쉽게도 찾을수 없었다. '동천(洞天)'이란 '하늘 아래 첫 동네'란 뜻으로 조선 영조때 발간된 택리지에서 따온 것이다. '경치가 뛰어난 곳' 혹은 '땅 위 제일 좋은 곳'을 일컫는 신선이 사는 무릉도원에 비유한 것으로 하동 쌍계사의 화개동천, 합천 해인사의 홍류동천과 더불어 '영남의 3대 동천'으로 불렀다 전해지고 있다. 

운흥사지 입구의 돌 표지석. 김동균기자 justgo999@

 높다란 감나무가 있는 절 입구에 올라 서야 엄청난 규모의 산속 가람 부지임을 알수 있다. 창건 설화에 따르면 원효대사가 기장군 장안사 척판암에 있을때 세상의 진리를 식별하는 혜안을 가져 서쪽 하늘을 바라보니 당나라 산동성에 있는 법운사라는 사찰에서 승려 천명이 불공을 드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나 장마로 법당 뒷산이 당장 무너질 위기에 놓인 것을 알고 '해동원효'라는 글이 적힌 소반(작은 판자)를 날려 보냈다. 그러자 절은 순식간에 금빛으로 변해 놀란 승려와 신도들이 밖으로 나왔고 법당은 이내 무너져 모두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됐다. 

 이에 큰 깨달음을 얻은 법운사 천명의 승려들은 소반에 쓰인 '해동원효'라는 글을 보고 원효를 찾아와 제자 되기를 청했다. 원효는 척판암을 떠나 이들과 함께 지낼 곳을 찾다 자리 잡은 곳이 양산 원적산(圓寂山)이다. 이후 '천명의 성인이 사는 산'이라는 뜻을 지닌 천성산(千聖山)으로 바꿔 부르게 됐다 전한다.

울산 울주군 웅촌면복지센터 입구에 세워진 운흥동천 기념비. 김동균기자 justgo999@

 운흥사는 통도사의 말사로 조선시대 불교서적을 찍어내기 위한 경판(經板)을 만들던 사찰이었다. 2001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과 온돌방 등 건물지 7동과 명문이 새겨진 기와류, 자기류 등 여러 유물이 수습 됐고 승탑 6기, 수조 4기도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기록에 운흥사지는 운흥곡에 있으며 석탑이 3기가 있는데, 안쪽 2기는 온전히 남아 있다고 보고 됐다. 또한 돌다리도 연정교, 환학교, 세진교, 청하교 등 4개 이상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찰 인근에는 종이의 재료가 되는 닥나무가 자생하고 있고 인근 마을 중 '닥나무마을'이란 뜻을 지닌 저리(楮里)마을도 있다. 계곡 수량이 풍부하고 닥나무 껍질을 벗기거나 삶아 씻어 잘게 부술 때 사용하는 딱돌로 추정되는 넙적바위들이 경내 이곳 저곳에 있다. 물을 담았던 석재 수조도 남아 있어 목판 뿐만 아니라 종이도 함께 제작됐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반계마을과 계곡  주변에 흩어져 있던 모아 놓은 운흥사지 돌종형 승탑 4기는 복원이 완전히 이루어 지지는 않았다. 김동균기자 justgo999@

 조선 전기에 조지서(造紙署)라 불린 관영 지소(紙所)에서 종이를 생산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란을 겪으면서 생산 체계가 붕괴돼 사찰 승려들에게 지역(紙役)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승려를 교육시키고 배출했던 대가람 통도사도 종이를 나라에 조공으로 바치는 과도한 지역에 시달렸기 때문에 불경용 목판을 만들던 운흥사에 종이 제작업무도 전담시켰다고 한다.

 불경을 잘 만든다는 사찰마다 종이 생산 부역이 떨어졌고 지역, 종이 제작 노역은 가혹했다. 종이를 얻기 위해서는 닥나무를 심고 키워 베어낸다. 베어낸 닥나무는 삶고 개울에서 씻어내 나무 방망이로 두드려 찧어내는 과정을 반복해 햇볕에 말려야 한다. 

 스님들 공부하는 일은 맡은 이판승(理判僧)과 절 살림을 맡은 사판승(事判僧)도 덩달아 힘겨워졌다. 노역에 지치고 쇠약해진 이판사판뿐만 아니라 대부분 승려들도 절을 떠나 하나 둘 흩어지고 운흥사는 결국 폐사 위기에 이르지 않았을까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역사서에 운흥사의 기록이 전해지고 사명대사도 머물렀던 사찰이었으나 1749년 영조 25년 '학성지'에는 운흥사와 관련된 기록이 없다. 이전에 폐사되거나 폐사 지경에 놓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운흥사지의 승탑 4기(사진 위)와 운흥사 절터에서 700m 떨어진 시적사에 있는 운흥사 승탑 2기(울산시 기념물 제43호)의 모습.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운흥사지의 승탑 4기(사진 위)와 운흥사 절터에서 700m 떨어진 시적사에 있는 운흥사 승탑 2기(울산시 기념물 제43호)의 모습.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통도사는 1884년(고종 21년) 주지 덕암당 혜경(蕙憬)스님이 순찰사 권돈인(權敦仁)을 설득해 지역을 면하는 임금의 교지를 받아냈다. 그리고 '산 같고 바다 같은 은혜'를 기려 '덕암당혜경지역혁파유공비(德巖堂蕙璟紙役革罷有功碑)'라고 세긴 비석을 경내에 세웠다. 제지 부역으로 사찰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엿보인다. 

 조선 후기 운흥사에서 제작한 경판은 총 16종 673점에 달한다. 합천 해인사 다음으로 많은 규모라고 알려져 있고 통도사에서 목판을 보관하고 있다. 무릉도원 같은 계곡과 산지평원에서 천년을 넘게 이어온 가람이 나라 부역에 시달리다 문을 닫게 된 아픔이 정족산 품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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