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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향 시인
심수향 시인

건조한 날씨가 몇 달째 지속되는 지난 삼월 중순이었다. 이른 봄볕이 사방 내려 앉아 나른한 날, 일이 있어 시청에 들렀다. 민원실에 발 들여놓기 전에 시청 어디에선가 날아온 매화 향에 이미 내 넋의 반은  빼앗기고 있었다. 볼일을 끝내고 서둘러 뜰에 나섰다. 매화 향기가 손을 잡아 끄는 것 같이 허둥거렸다. 옛 어른들은 매화 향기를 암향(暗香)이라 노래했건만, 나는 명향(明香)이랄까 현향(顯香)이랄까 이런 조어(造語)를 만들어보고 싶은 충동에 들 정도로 매향은 매혹적이었다. 눈으로도 보이고 귀로도 들리는 듯한 향기를 좇아갈 밖에 도리가 없었다. 향기의 진원지인 매화는 시청 청사만큼이나 나이를 먹어 위엄을 더하고 있었다. 아름드리 몇 그루 매화나무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굳이 탐매 길에 나서지 않아도 이리 쉬 매화를 만날 수 있다니! 발끝에 흥이 실렸다. 

그 며칠 빠르게 오른 기온으로 매화는 꽃잎을 반쯤 떨구고 있었다, 수목들 사이 꾸며진 작은 개울에 묵은 매화 가지가 드리워져 선계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자체만으로도 한 폭 그림이고, 한 편의 시였다. 잔잔한 물 위에 점점 꽃잎이 떠있고 연분홍 꽃길이 물가로부터 생겨나고 있었다. 김홍도의 풍속도 몇 점 두서없이 스쳐지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청 앞 버스 떠나는 소리가 나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번쩍 정신이 드니 노랑나비 두 마리가 희롱하듯 한참을 떠돌다 저만치 날아갔다. 

한가한 봄날 한때가 아름답게 흘러가고 있었다. 뜰에 놓아둔 장의자에 앉아 시청 뜰에 이런 소품같이 꾸며진 곳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었다. 매화 지면 살구꽃 목련이 피고, 뒤이어 벚꽃 영산홍 필 테고…그 생각에 답하듯 한 장년의 자그만 부인이 슥 곁에 와 다가 앉았다. '왜 이러나? 이상한 종교 포교자인가?' 하고 나는 잔뜩 긴장하고 외면했다. 그런데 그 부인은 내가 돌린 눈길 쪽에 막 봉긋이 열리는 목련을 보더니 "야음동엔 목련이 다 피었어요." 하면서 다짜고짜 자신의 핸드폰을 열어 사진을 내밀었다. '영춘화 아닙니까?" 나도 모르게 다가앉았다. 그녀는 자신을 골목투어에 맛들인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녀의 말솜씨에 이끌려 고개를 디밀고 그녀가 건져온 골목투어 결과물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처음의 경계심과 긴장이 조금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스밀 듯 풀리는 봄빛이 얼어붙은 마음과 코로나 19로 멀어진 사람과의 거리를 무장해제 시켜버린 모양이었다. 헤어질 때 그녀는 내게 흑매를 본 적 있느냐고 과제 하나를 던졌다.

집으로 오는 버스 속에서도 매화향이 계속 맴돌았다. 그녀가 던진 흑매는 나를 매화에 붙들어 놓고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탐매를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인터넷이라는 문을 열면 끝없이 펼쳐지는 세상은 볼 때마다 경이롭다.

이 경이로운 세상 속에서 건져낸 매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우선 구구세한도. 밤이 가장 긴 동지에 선비들이 가로 세로 9×9=81 송이의 매화를 먹으로 그려놓고 매일 한 송이씩 색칠하며 매화를, 봄을 기다리며 겨울을 보내는 것을 구구세한도라 한다. 여든 한 송이가 색으로 물들 무렵 매화가 꽃문을 여는 봄이 되었던 것이니 삭막한 겨울을 풍류로 지낸 선비들의 멋을 볼 수 있다. 

근자에 들어 회자되는 것 중 조선 후기 시인 안민영의 연시조 매화사(梅花詞) 8수가 있다. 중학교 국정교과서 국어책에 제 6수가 수록된 바 있고, 모의고사와 수능에 출제되면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그 중 제 3수에 보이는 빙자옥질(얼음같이 맑고 깨끗한 살결과 구슬같이 아름다운 자질), 아취고절(매화의 우아하고 높은 절개)등이 출제되면서 수능 세대들에게는 익숙한 내용인 셈이다. 

매화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소개 되지만 퇴계 이황 선생의 매화 사랑을 빼놓고는 매화를 말할 수 없다 하는 이들이 많다. 퇴계 선생의 매화에 대한 시는 조금씩 차이는 나지만 110 수 정도이고, 그 중 71 수를 뽑아 엮은 매화시첩이 현대물로 간행될 정도로 유명하다. 퇴계 선생의 유언이 '매화분에 물 주어라'였다니 가히 선생의 매화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엿볼 수 있다. 

봄이면 매화 마니아들은 탐매행을 떠난다 한다. 서로 나누는 유명 매화 정보 중에는 화엄사 흑매, 선암사 고불매, 산청군의 남명매, 원정매, 전당매...오래 되고 그 자태가 아름다운 매화가 많이 소개 되고 있었다. 우리는 영남의 봄을 알려주는 통도사 자장매를 가장 우선순위에 놓을 수 있겠다. 그녀가 던진 흑매는 화엄사 홍매처럼 그 색이 검붉다는 데서 흑매라 불리었다 한다. 흑매에서 시작한 매화 탐방은 이렇게 길을 튼다. 즐겁고 향기로운 날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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