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매물도에서 바라본 등대섬 풍경. ⓒ이상원
소매물도에서 바라본 등대섬 풍경. ⓒ이상원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걸 보고 불현듯 그 섬에 가고 싶었다. 오래 전 사진 촬영하러 갔을 때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이 떠올랐고,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어 내 마음은 한달음에 그곳으로 달려 가고 있었다. 바로 경남 통영의 남쪽에 있는 소매물도·등대섬이었다.

이곳의 큰 매력은 소매물도와 등대섬 사이의 바닷길이 하루 두 번씩 열릴 때 드러나는 몽돌밭을 건너 오가는 것이다. 가는 날은 아침 일찍과 늦은 오후에 바다가 열려서 등대섬까지 갔다 오면 뭍으로 나가는 마지막 배를 탈 수 있는 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굳이 물때를 맞춰 날짜를 정하지 않고 날씨가 좋은 날 1박을 할 준비를 하고 갔다. 

소매물도 전망대에서 바라본 등대섬, 대구을비도(좌)와 소구을비도(우). ⓒ이상원
소매물도 전망대에서 바라본 등대섬, 대구을비도(좌)와 소구을비도(우). ⓒ이상원

섬에 도착해 카메라 배낭과 삼각대, 간식을 챙겨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먼저 만난 것은 폐교된 ‘소매물도 분교’였다. 낡은 건물과 함께 ‘1961년 4월 29일 개교하여 졸업생 131명을 배출하고 1996년 3월 1일 폐교되었음’이라고 검은 돌에 새겨진 교적비! 작은 종을 치면 조그만 운동장에 옹기종기 모여 선생님과 함께 뛰어 놀고, 풍금 소리에 맞춰 동요를 부르는 섬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그려져 가슴이 짠했다. 

소매물도에서 가장 높은 망태봉(해발 152m)에서 등대섬으로 가는 길은 나무 계단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관광 비성수기의 평일인데다 물때 시간이 맞지 않아 관광객은 많이 오지 않았고, 마지막 배편 시간이 다가오자 다른 관광객은 모두 떠나고 그 섬엔 나 혼자밖에 없었다. 옛날 사진 촬영을 위해 2번 왔을 때는 관광객이 많았고, 섬에서 나가는 배 시간에 맞춰야 해서 무척 바삐 움직여야 했다. 이번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느긋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다른 때는 좀처럼 하기 힘든 내 자신의 모습도 찍었다. 

남쪽의 섬이라 벚꽃과 복숭아꽃 등 여러 봄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새롭게 알게 된 ‘까마귀쪽나무’의 새싹도 눈에 들어왔다. 소매물도에서 바라보는 등대섬의 풍광은 언제 보아도 최고의 경치이다.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 국립공원 선정 ‘경관자원 100선’, 한국관광공사 선정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대표 관광지 100곳’, ‘통영 8경’ 등의 명성에 손색이 없었다. 

작은 섬을 푸르게 했던 소나무는 많이 죽어 베어져 있었다. 전국을 강타하고 있는 소나무재선충병을 여기도 피해가기 어려웠던 것 같다. 방제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나 언제까지 소나무를 지킬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소매물도와 등대섬을 이어주는 열목개 바닷길. ⓒ이상원

 

소매물도와 등대섬을 잇는 약 70m의 바닷길, ‘열목개’. 이 길은 하루에 두 번 열린다. 바다 갈라짐이란 달의 인력으로 생기는 저조(썰물) 때 주변보다 수심이 얕은 지형이 해수면 위로 드러나 육지와 섬, 섬과 섬 사이에 바닷길이 생겨 바다를 양쪽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보이는 자연현상이다. 우리나라 남서해안과 같이 해안선이 복잡하고 조차가 큰 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 ‘모세의 기적’이라고도 불리는 이 신비한 바닷길은 진도, 제부도, 소매물도 등이 잘 알려져 있으나 전국에 모두 14개 지역이 있다. 바다 갈라짐은 국립해양조사원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지역, 연도와 월, 일을 선택하면 바다 갈라짐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무거운 카메라 배낭을 메고 가파른 길을 내려왔을 때 열목개가 열려 몽돌이 촉촉히 젖어 있었다. 순전히 세월의 힘으로 만들어진 신비한 이곳의 몽돌은 덩치가 커서 파도나 바람에 쉽사리 휩쓸리지 않는다. 남해안의 다른 자잘한 몽돌들처럼 파도와 함께 휩쓸리며 내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으나 동화 속의 공룡알을 만난 듯한 기분은 느낄 수 있다. 

등대에서 바라본 소매물도와 대매물도. ⓒ이상원
등대에서 바라본 소매물도와 대매물도. ⓒ이상원

몽돌을 조심스레 밟고 지나서 등대섬에 오르자 46년 전의 추억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지금과 같은 대형 정기여객선이 없던 시절, 섬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던 작은 배를 타고 곧바로 등대섬으로 와서 2박 3일 놀다 갔던 일…!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고등학교 친구 2명, 중학교 여자 친구와 그녀의 고등학교 친구 등 5명이 지금의 텐트와는 비교도 안 되는 좁고 불편한 A형 텐트 2개를 빌려 등대섬 언덕에서 야영을 했다. 지독한 섬 모기에 물어 뜯겨 가면서 저녁을 먹고 캄캄해졌을 때 소매물도에 사는 젊은이들 네댓 명이 찾아왔다. 육지에서 같은 또래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작은 배로 밤낚시를 해서 마련한 싱싱한 횟감과 소주를 들고 찾아온 것이었다. 밤 늦게까지 함께 술을 마치고 얘기를 나누다가 그들은 작은 배를 타고 돌아갔다. 순박하고 건장했던 그 청년들은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이튿날에는 등대원 아저씨가 우리를 숙소에 재워 주어 편하게 잤다. 그때 우리를 챙겨주며, ‘등대지기’의 애환을 들려주었던 그분은 또 어디서 어떻게 살고 계실까?

등대섬 등대와 기암괴석 파노라마. ⓒ이상원
등대섬 등대와 기암괴석 파노라마. ⓒ이상원

우리는 흔히 등대를 관리하는 사람을 ‘등대지기’라고 부른다. 친근하고 애틋함이 담긴 호칭이지만

전문 자격증을 갖추고, 묵묵히 헌신하는 사람에 대한 폄하의 의미가 크다는 현장 여론에 따라 1988년 ‘항로표지관리원’으로 명칭이 공식화 되었다. 등대원들은 등대에 근무하는 해양수산부 직원이라는 뜻으로 ‘등대직원’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등대의 공식 명칭도 항로표지관리소이다. 

대매물도와 소매물도 공룡바위, 등가도. ⓒ이상원
대매물도와 소매물도 공룡바위, 등가도. ⓒ이상원

등대에서 바라보는 소매물도는 마치 공룡이 낮은 자세로 누운 형상이다. 가쁜 숨을 내쉬고 등대에 서면 또 다른 절경을 만나게 된다.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다. 느긋하게 등대와 깎아지른 기암절벽, 주상절리와 하나가 된 기분으로 촬영을 했다. 푸른 바다를 외롭지 않게 하는 크고 작은 섬들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9마리의 새가 나는 모습이라는 대구을비도(大九乙飛島)와 소구을비도(小九乙飛島), 6개 바위로 이루어진, 작은 무인등대가 있는 등가도(登加島), 괭이갈매기의 최대 서식지로 천연기념물인 홍도(鴻島)…이름을 알고 바라보니 더욱 정겹게 느껴졌다. 등대 아래에는 중국 진나라 시황제의 신하인 서불(徐市)이 불로초를 구하러 왔다가 그 아름다움에 반해 ‘徐市過此(서불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았다는 ‘글씽이굴’이 있다. 문득 진시황이 불노초를 구하려는 노력을 섭생하고 운동하는데 기울였다면 49세에 죽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등대섬을 내려와 소매물도로 되돌아가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서 카메라 배낭에 이것저것 챙겨 넣고 온 나의 어리석음을 살짝 후회했다. 벚꽃이 피어있는 전망대에서 등대에 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혼자 있으니 외로웠고, 봄이라 해도 3월의 바닷바람은 차가웠다. 어둑해졌을 때 등대에 불이 밝혀졌다. 등대는 불빛을 비춰야 제 몫을 하는 것이다. 등대의 불빛을 보자 외로움과 추위도 가셨다. 등대불빛이 주는 안도감과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오롯이 혼자서 이 섬을 독차지한 기분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다시 오지 않을 터…! 살아오면서 아직도 떨쳐내지 못한 마음 속의 불길이 가라앉고, 시끄러운 세상사도 머리에서 지워지며 잠시나마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 

‘등대지기’란 노래가 떠올라서 불러 보았다. 

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한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불을 밝힌 등대섬 등대. ⓒ이상원
불을 밝힌 등대섬 등대. ⓒ이상원

 

소매물도 등대는 이곳에서 약 70km 떨어진 쓰시마(対馬島) 쪽에서 오는 배에 길을 열어주기 위해 일제감점기인 1917년에 무인등대로 세워졌고, 1940년에 유인등대로 바뀌었다. 이 등대도 대부분의 등대와 마찬가지로 빛을 확대할 수 있는 프리즘 렌즈를 이용한 대형 등명기의 등이 360도 회전을 하면서 직선으로 불빛을 쏘고, 몇 초당 한번씩 같은 곳을 비추게 되어 있다. 배가 등대를 식별할 수 있도록 등대마다 불빛이 깜빡이는 주기가 다르다. 소매물도 등대는 높이가 16m이며, 13초당 한번씩 불이 깜빡이고, 26마일(약 42km)까지 빛을 비춘다.

전국에 유인등대는 2022년 말 기준으로 31곳이다. 디지털 시대를 이유로 점차 유인등대는 줄고 무인등대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경제적 효율성과 행정 편의주의에 따른 유인등대의 무인화 정책에 대해 재검토를 주장하고 있다. 등대는 고유 기능인 항로표지뿐 아니라 영토수호, 불업조업 감시, 구호시설, 관측시설, 통신기지 등의 역할이 대두되고 있다. 또 일상에 지친 현대인에게 경관이 빼어난 등대는 좋은 휴식 공간이다. 100년이 넘은 등대의 역사성과 사회문화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등대를 현장에서 관리하는 사람이 필수적이다. 숭고한 희생과 헌신의 상징인 등대직원이 희망의 상징인 등대를 오래도록 지켰으면 좋겠다.  

촬영을 마치고 랜턴으로 불을 밝히고 숙소로 정한 펜션으로 돌아왔다. 방바닥이 따뜻했다. 이곳은 남해안의 외딴 섬이었으나 1986년 한 과자회사의 광고의 배경지로 소개되어 ‘쿠크다스 섬’이란 별칭을 얻었고, 각종 광고와 영화에 등장하면서 관광객이 폭증했다. 전기는 밤에도 발전기를 돌려 생산하므로 큰 문제가 없으나 물이 나지 않아 불편함이 많다. 생활용수는 빗물, 바닷물이 섞인 지하수, 급수선에 의한 물 공급으로 충당하고, 식수는 시판하는 생수로 해결한다. 또한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처리가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대매물도와 일출. ⓒ이상원
대매물도와 일출. ⓒ이상원

이튿날 캄캄한 새벽에 일출 촬영을 위해 길을 나섰다. 금지된 사랑의 슬픈 전설이 있는 남매바위 쪽으로 걸었다. 대매물도와 어유도, 거제 망산을 조망하며 걷는 평탄한 길을 지나자 가파른 길이 이어졌다. 어둠이 가시면서 동백나무 터널을 지날 때 피어 있는 동백꽃이 선명했다. 일부는 떨어져 있었다. 동백꽃처럼 피어 있을 때 아름답고, 땅에 떨어져도 기품을 잃지 않는 꽃이 또 있을까 싶다. 

소설가 김훈 선생은 그의 책, <자전거여행>에서 동백꽃을 보고 이렇게 적었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버린다. 동백이 떨어진 나뭇가지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 문득 있던 것이 문득 없다. 뜨거운 애욕의 정념 혹은 어떤 고결한 영혼처럼’

일출 촬영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 바쁘게 움직여 대매물도와 일출을 담을 수 있는 전망 좋은 장소에서 기다렸으나 미세먼지 때문에 소망스런 일출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일출을 보았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이쪽 방향에서 바라본 아침햇살 받은 등대와 촛대바위 풍경은 또 멋졌다. 

아침 햇살 받은 등대와 촛대바위. ⓒ이상원
아침 햇살 받은 등대와 촛대바위. ⓒ이상원

국립공원관리공단은 트레킹 코스로 미륵도(달아길), 한산도(역사길), 비진도(산호길), 연대도(지겟길), 매물도(해품길), 소매물도(등대길) 등 6개 섬에서 주민들이 다니는 작은 오솔길을 연결해 42.1km의 바다백리길을 만들었다. 작은 목표를 정해 틈틈이 찾아 걸으면서 바다와 섬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눈과 머리를 정화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다. 그에 더하여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힘겹고도 애틋한 삶도 엿보고, 그분들이 생산한 건강한 먹거리도 맛보면 여행의 맛이 더 깊어질 것이다.  

새삼 여행이란 미루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리저리 재고 따졌다면 벚꽃 핀 아름다운 섬에서 혼자의 시간을 즐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무모하더라도 도전을 통한 새로운 체험이 힘든 삶을 이겨내는 활력소가 되고, 때론 삶의 방향도 바꿀 수 있음을 확인했다. 여건이 좋아지고 소망스런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 과연 그날이 올까? 많은 준비를 하지 않고도 그냥 생각날 때 가고 싶은 곳으로 훌쩍 떠나는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상원 사진가 swl5836@naver.com
이상원 사진가 swl5836@naver.com

 

‘기르던 사과나무에 꽃이 지거든

미련 없이 여행을 떠나라

꽃을 피웠던 힘으로 사과는 열릴 것이니

……………………………

기다림이라는 시간에 속지 말고

사과 꽃이 다시 피기 전에

미련 없이 여행을 떠나라

- 조동례 시인의 시, ‘나를 찾아서’ 중에서 –

이상원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