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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군 청량면 율리 문수산(왼쪽)과 영축산 아래에 위치한 영축사 절터(주황색 점선).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울주군 청량면 율리 문수산(왼쪽)과 영축산 아래에 위치한 영축사 절터(주황색 점선).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울주군 청량면 율리 영축사(靈鷲寺) 창건에 대한 신비로운 설화가 삼국유사에 남아있다. 

 신라 신문왕 때 충원공이란 재상이 있었다. 그는 온천욕을 좋아해 장산국(부산 동래온천)에서 온천을 마치고 서라벌로 돌아오던 중 굴정역(울주군 범서읍 굴화리 일대)의 동지야에서 잠시 쉬었다. 때마침 일행 중 한 사람이 매를 날려 꿩을 쫓게 했는데 꿩이 금악(金岳)을 넘어 날아가더니 자취를 감춰 버렸다. 충원공과 일행들은 매의 방울 소리를 쫓아 가보니 관청 북쪽 우물이 있었다. 

 우물 안에는 꿩이 날개를 펼쳐 두 마리 새끼를 감싸고 있는데 온몸이 핏빛이었다. 매는 나무 위에 앉아 꿩을 바라보기만 할뿐 낚아채려 하지 않았다. 이를 측은히 여긴 재상이 그 땅에 대해 점을 쳐서 물었더니 절을 세울만하다는 점괘가 나왔다. 

 서라벌로 돌아와 즉시 왕에게 이를 전하니 관청은 다른 곳으로 옮기고 절을 지으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신문왕 3년(683년)에 세워진 이 절이 '신령스러운 매(독수리)의 절'이란 뜻을 지닌 영축사이다. 삼국유사에 전해진 영축사는 지금은 사라지고 그 절터로 추정되는 문수산 남쪽 기슭 절터(울산시 기념물 제24호) 자리에 에 동·서 2개 석탑과 귀부·석등 등 부재가  남아 있다. 

 울산박물관은 2012년 12월 부터 2016년 까지 총 5차례 걸쳐 폐사지 '울산 영축사지'에 대한 학술조사를 벌였다. 금당 앞에 동·서 2기의 삼층쌍탑이 있는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쌍탑일금당 배치형 가람 흔적을 밝혔다. 

울주군 청량읍 영축사지 발굴조사 현장의 모습. 울산박물관 제공
울주군 청량읍 영축사지 발굴조사 현장의 모습. 울산박물관 제공
금당 앞에 2개의 탑이 배치되고 회랑도 갖춘 영축사의 절터 배치도. 울산박물관 제공
금당 앞에 2개의 탑이 배치되고 회랑도 갖춘 영축사의 절터 배치도. 울산박물관 제공

 

비석 몸돌과 거북 형상의 머리 없이 발견된 영축사지 귀부.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비석 몸돌과 거북 형상의 머리 없이 발견된 영축사지 귀부.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영축사지 서탑의 부재.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영축사지 서탑의 부재.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동탑의 사리공이 드러난 몸돌과 지붕돌.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동탑의 사리공이 드러난 몸돌과 지붕돌.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또한 가람 입구 중문지, 지붕을 갖춘 복도 회랑지, 설법전 강당지 등 건물터와 불상·청동기·기와·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돼 자세한 사찰 흔적을 찾아냈다.

영축사지 동서탑 복원도. 울산박물관
탑의 높이가 동탑 1.20m, 서탑1.24m에 이르는 영축사지 쌍탑 복원도. 울산박물관
영축사지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청동향로. 울산박물관 제공
영축사지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청동향로. 울산박물관 제공
영축사지 북동쪽 축대에서 출토된 허리 아래 하반신 일부만 남은 '석조여래좌상 편'의 앞과 뒤 모습. 가사 자락 윤곽이 선명이 새겨져 있다. 울산박물관 제공
영축사지 북동쪽 축대에서 출토된 허리 아래 하반신 일부만 남은 '석조여래좌상 편'의 앞(사진 위)과 뒤 모습. 가사 자락 윤곽이 선명히 새겨져 있다. 울산박물관 제공
영축사지 금당지 출토 금동여래입상(왼쪽)과 동탑지 출토 금동여래입사의 모습. 울산박물관 제공
영축사지 금당지 출토 금동여래입상(왼쪽)과 동탑지 출토 금동여래입상의 모습. 울산박물관 제공
영축사지 금당지 출토 금동여래입상. 울산박물관 제공
영축사지 금당지 출토 금동여래입상. 울산박물관 제공
영축사지 동탑 출토 금동여래입상. 울산박물관 제공
영축사지 동탑 출토 금동여래입상. 울산박물관 제공

 결정적으로 영축(靈鷲)이라 새겨진 명문와와 고려때 만들어진 청동기를 발굴해 폐사지가 영축사터로 신라때 세워져 고려 때까지 이어진 사찰임을 입증하는 주요자료가 되었다. 

영축사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영축(靈鷲)이 새겨진 명문와. 울산박물관 제공
영축사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영축(靈鷲)이 새겨진 명문와. 울산박물관 제공

 당시 신라 승려들은 죽음과 위험을 마다않고 당나라 뿐만 멀리 인도 천축국까지 유학길을 떠났다. 석가모니 고타마 싯다르타가 인도 마가다국 왕사성에 있는 '기사굴산'이란 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사굴산을 번역하면 영축산(영취산)이다. 이후 절터를 품은 몇몇 산에 영축산으로 불러졌다. 가까이 양산 통도사에 또다른 영축산도 그러하다. 한자 음대로 독수리 '취(鷲)'라 부르지 않고 불교식 음인 '축'이라 불러 영취산 보다 영축산이란 이름이 굳어졌다. 

 삼국시대 신라는 서북으로 적대국인 백제와 고구려가 있어 육로 대신 바닷길로 당나라와 문물 교류했다. 서라벌과 인접한 남구 황성동 외황강은 바닷길의 주요 거점이자 요충지로 보는 견해가 학계의 중론이다. 

 외황강에서 궁궐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영축산 일대는 자연스레 번창했을 것이다. 영축사는 동북쪽에 영축산 망해사, 서북쪽에 문수산 문수사, 서남쪽에 남암산 청송사가 모두 외황강 길목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신라 때 세워졌으나 사라진 4개의 큰 가람은 바닷길이 번성해지자 안전한 항해와 풍요를 기원하며 세웠을지 모를 일이다.

발굴조사 이후 영축사 절터와 석탑 부재 등 문화재 보존을 위해 철망이 설치되어 있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발굴조사 이후 영축사 절터와 석탑 부재 등 문화재 보존을 위해 철망이 설치되어 있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문수산행길에 오른다. 두왕천으로 내려가는 하천 옆 길 따라 식당들이 즐비하지만 유난히 국수집이 인기가 많다. 이곳 청량면 율리 인근이 영험함이 깃든 불국토로 울산 불교문화의 1번지였다는 사실에 놀라며 한그릇 국수로 산행길을 접는다.  김동균기자 justgo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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