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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향 시인
심수향 시인

장마가 시작되고 눅눅함이 사방에 깔려 몸과 마음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다. 비를 좋아하는 나도 우기가 끝나기를 은근히 기다리는데 빗소리를 유난히 좋아하는 지인이 있다. 주고받는 안부 문자마다 빗소리가 빠질 때가 없다. 빗소리 아름다운 밤이라든가 빗소리 듣기 좋은 날이라는 문구가 어김없이 들어 있다. 청소년 시절에야 문학 소년소녀가 아니라도 빗소리에 귀 기울이고, 바람 소리에도 공연히 설레어 긴긴 겨울밤 잠을 설친 적도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감상적인 마음이 많이 줄어들었을 것임에도 그녀는 여전히 빗소리가 아름다운 것이다. 

 떨어지는 곳마다 다른 소리를 내는 빗방울에 귓바퀴를 세우고 숨죽여 귀 기울여본 적 있는가? 이럴 때 빗소리는 이야기이고 노래고 슬픔이고 눈물이 되어 온다. 비온 뒤의 날아오를 듯 청청해진 나무와 풀, 그리고 웃음이라는 의무에서 벗어나 한 숨 자고난 듯 후줄근해진 꽃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도 가볍고 상쾌하다. 비온 후 사물들이 온몸으로 비를 받아들여 자신이 가진 색에 한층 더 깊어진 색(色)을 보여줄 때는 숙연해지기도 한다. 허나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 듯이 우기가 길어지면 이러한 변화에도 둔감해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우기를 불편해하는 분들에겐 전혀 공감을 얻지 못하기도 하고, 빗소리 운운하다가 핀잔을 받을 때도 있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사람마다 여가를 즐기는 방법이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풍광 좋은 곳으로 나들이 가거나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 또한 그렇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니다가도 '이런 곳에서 내 남은 생을 보내고 싶다'고 여겨지는 장소를 문득 만날 때가 있다. 나는 대부분 계절의 변화로 잠깐씩 달라진 풍경에 이끌리는 편이다. 이를테면 오동꽃 흐드러진 언덕이거나 찔레꽃이나 탱자꽃이 하얗게 깔린 과수원 길이거나…. 생활의 여건은 배제된 채 풍경만 보고 무작정 그곳에 삶의 보따리를 풀고 싶은 감상에 이른다. 나의 이런 생각은 함께 한 일행들에게 거의 공감 받지 못하는 편이다. 감상에 젖어 떠드는 나를 낯선 듯이 바라보는 시선이 온다싶으면 스스로 목소리를 줄여간다. 공감 받지 못하는 마음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또 한 예는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는 기억에도 없지만, 지금까지도 가슴에 묻힌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것은 어떤 분이 세계 여행 중 바다가 있는 마을의 작은 호텔에 묵게 되었단다. 고급스런 호텔은 아니었으나 바다는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방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방에 들어가 보니 바다도 보이지 않고, 파도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 실망하여 맥없이 앉아 있는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작은 버턴과 그 위에 적힌 쪽지였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그 쪽지를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바다가 보이지 않아 실망하신 고객님을 위해 파도소리를 준비해 두었으니 원하시면 버턴을 눌러보라' 적혀 있었다. 그는 큰 기대 없이 그 버턴을 눌렀다.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운 파도소리가 들려오더라는 것이다. 얼마나 깊은 감동을 받았는지 그는 좀 전의 실망도 다 잊고 그 호텔에 푹 빠져버렸다는 이야기다.

 상상해 보건데 그 호텔 사장은 어릴 때부터 호텔을 갖는 것이 꿈이었을지 모른다. 어른이 되어 그는 호텔을 짓기 위해 자금을 모았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호텔을 지으려고 보니 자금이 부족해서 입지가 좋지 않은 땅을 구입했거나, 전망 좋은 곳은 이미 다른 호텔이 들어서버렸거나 하였을 것이다. 결국 주인은 자신이 꿈꾸던 전망과 파도소리를 잃어버린 호텔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전망을 상상하며 여행 왔을 여행객들의 실망하는 모습이 호텔 사장의 눈에 선하게 떠올랐을 것이다. 그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 방마다 파도소리를 녹음해 들려주려는 마음을 장치하게 되었으리라. 그리고 그는 정성을 다해 쪽지를 써 붙였으리라. 

 내가 가장 이끌린 부분은 녹음된 파도소리가 물론 아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파도소리를 녹음했을 호텔 사장의 그 마음이다. 배려랄까 따스함이랄까 순수함이랄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얼마나 훈훈하고 푸근한 마을일까 상상해본 것이다. 그래서 열변을 토하며 공감을 끌어내려 했으나 내겐 역부족이었다. 지금도 그와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떠나는 꿈은 꾸지만 끝내 이루지 못할 것을 안다. 이유는 나를 감동시킨 라디오 출연자 같이 다른 이의 공감을 이끌어낼 재능이 내게는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밖에 아직 비가 내리고 있으려나? 빗소리에 빠져 있는 그녀에게 진심 공감하는 마음 한 조각이라도 보내야겠다. 심수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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