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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 울산문인·요양보호사
김현주 울산문인·요양보호사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참선에 들어가기 전에 수행자가 진리를 찾는 문제를 처음 마음에 담는 말이 화두이다. 대부분의 화두는 풀릴지는 몰라도 효에 대한 화두만큼은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는 미로다. 그만큼 진중하고 깊은 것이다.

 요양원에는 하루 종일 침상에 누워만 계시는 어르신들이 많다.

 치매로 인해 기억은 거꾸로 흘러가고, 아주 오래전 가슴에 품었던 옹이 같은 응어리, 이야기보따리는 하루하루 조금씩 실타래처럼 술술술 풀어낸다. 어쩌면 이승에서의 남은 삶의 모서리를 깎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들 여섯에 며느리 여섯, 도합 열둘이다"를 외치시는 신 어르신은 목소리가 젊은이 버금가는 짱짱한 힘이 있고 울림이 크다. 작은 체구에 아들 여섯을 낳고 기른 내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할아버지 세상 배린지 오래 되었다. 하나도 안 보고 싶다" 강한 부정은 긍정의 의미일까?

 "사랑해서 아들 여섯을 두셨는데 보고 싶어야 하는데요?" 웃으며 응대해 드리지만, "하나도 안 보고 싶다"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담긴 마음은, 고단했던 일상의 사연이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남았는지 모른다. 홀로 남은 여생이 힘들다는 뜻도 있으리라 짐작해 본다.

 산 밑에 자갈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은 이야기. 늑대를 만나도 억척스럽게 산으로, 밭으로 다니며 농사를 지은 이야기는 장편소설이 된다.

 어떤 날은 돈 빌려주고 못 받은 이웃을 욕하기도 하고, 친하게 지내던 이웃의 택호를 애타게 부르며 보고 싶다며 집에 밥 먹으러 오라고도 하신다.

 밤낮이 바뀌는 날은 밤새도록 큰 소리로 지나온 세월 이야기를 하고, 아들 이름을 부르고 불러서 다른 어르신 수면 방해를 하기도 하여, 난감함을 겪기도 한다. 오늘도 종일 돈 빌려 가서 안 준 이웃을 욕하신다.

 "어르신 내일 아침에 경찰서에 신고하고, 도둑도 잡고, 아들도 만나러 가요" 하면 그제사 잠을 청하기도 한다. 덧댄 흔적이 가득한 옷을 입고 배고픔을 참아가며 기운 흔적이 찬란했던 그 시절 지독한 가난을 견뎌낸 세월 속에 자식들을 품었다. 나에게도 지난 시간 속에 가난은 힘든 기억으로 남는다. 유아교육과에 입학하여 피아노가 필요해서 사 달라고 조르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그 원망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지금은 먼 곳에 가신지 오래 되었고, 그 상황을 이해할 만큼 시간도 흐르고 흘렀다. 제가 아는 작가는 대학 등록금 마감일이 다 되도록 돈 마련을 하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 밤길을 나섰다. 마을 구판장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며 부모 노릇 못한다고 소리를 지른 일을 평생 가슴에 멍으로 가지고 살기도 한다. 아버지는 소를 팔거나 논밭을 팔아 등록금을 주던 시절이었다. 우리 세대 부모님들은 자식 뒷바라지에 온 혼을 쏟아내고, 온몸으로 지켜나갔다. 부모가 되지 않고는, 자식을 낳아 기르지 않고는 감히 느끼지 못한 삶의 무게를 지켜낸 것이다. 학교 다닐 때 어버이날 행사에 빠지지 않는 어버이날 노래는 늘 기억 속에 남아 뭉클한 감동을 준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고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때맞춰 덜어내고 비워내는 자연의 순리처럼 부모님은 자식의 효를 기다려주지 않고 먼 길을 떠나신다.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머무르지 않는 시간이기에, 우리는 지금 부모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코로나의 긴 터널도 조금씩 물러나고 면회가 되기 시작하면서 요양원을 찾는 보호자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집에서 즐겨 드시던 음식을 해 와서 드리기도 하고, 끼니 때마다 드리라고 살 바른 생선, 조기를 소분 해 오시기도 한다.

 지극한 마음을 알기에 요양보호사들은 알뜰하게 잘 챙겨 드리고 있다. 반면에 며느리, 아들, 자녀분들이 오셔도 빈손으로 오시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요양원에서 영양적으로 챙겨 드린다 해도, 어르신들은 집에서 즐겨 드시는 음식 생각은 간절하지 않겠는가? 

 어찌 보면 참으로 짧은 면회 시간, 못다한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어르신들의 인지 능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 할지라도, 알고 있지 않을까?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그리움으로, 간절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오랜 면회가 없었던 시간이 흐르고 코로나가 주춤할 때 아들이 면회를 와서 아무 말도 없이 앉은 어머니를 보고는 "워메~ 우리 엄니가 나를 몰라 보는 갑네. 우짜까이?" 말하자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큰소리로 "기철이여~~" 아들을 알아보고 이름을 부른 것이다.

 얼마나 보고 싶고 불러보고 싶은 자식의 이름일까?

 왜? 함께 살 수 없는 것일까? 어머니는 면회가 끝나고 떠나는 아들 생각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실까? 요양보호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할 수 없는 일이지. 집에 가고 싶다고 갈 수 없는 걸…"

 사연은 모두 다 다르지만, 우리 부모님들은 집에서, 고향에서. 자식들과 마지막 노후의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이승의 마지막을 하루하루의 귀한 순간들을 요양시설에서 보내고 계신다. 

 孝는 끝까지 부모님을 돌보는 마음에 있다. 그 마음이 몸이 떨어져 있다고 탈색되지 않도록 덧칠하고 또 덧칠하여 찬란한 빛깔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김현주 울산문인·요양보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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