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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왕생이
삽화. ⓒ왕생이

1970년대 울산 문화예술계에서 약방의 감초 역할을 했던 다방을 소개한다. 울산 중구 원 도심 동헌 골목 명다방이다. 이 다방은 동헌 앞 중앙농협 건물과 붙은 4층 건물 지하에 있었다. 한국문인협회 울산시지부 부지부장을 지낸 서전 이상숙 시인(2015년 6월 작고)이 개업한 다방이다. 

이 다방에 대해 울산예총 서진길 고문(80)은 "마땅한 전시장이 없던 시절, 명다방은 문화예술공간으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장소였다. 울산상공회의소 전시장 등이 문을 열기 이전에는 명다방에서 작품전을 개최하고자 했던 문화예술인들이 줄을 이었다"고 회고했다. 

70년대 이상숙 시인이 개업

예나 지금이나 다방 하면 물장사라고 해서 빈정대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남의 입질에 오르내렸다.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시절, 다방을 개업한 이상숙 시인에 대해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최종두 울산예총 고문(시인·소설가)이 이상숙 시비가 건립되던 시기에 쓴 언론 칼럼 일부를 소개한다. 

'선생님은 경남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농대 재학 중 6·25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 울산으로 왔다. 대현중을 시작으로 제일중, 울산여고, 울산여상 등에서 교편생활을 했다. 당시 범곡 김태근, 김인수, 박기태 등과 백양동인회를 결성, 동인지 발간과 더불어 시화전, 음악감상회 연극공연 등을 펼치며 문화 예술운동의 씨를 뿌렸다. 이종수, 김상수, 김종수 김학균, 김규현 등과는 화조회를 만들어 사회 봉사활동을 펼쳤다. 울산문인협회 창립 때는 부지부장을 맡았으며 창립이 무산되려 할 때 선생님이 나서서 이뤄주셨다 ./중략/ 명다방을 운영하게 된 것도 순전히 문화운동의 사랑방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명다방이 문화예술인들의 회관 역할을 할 정도로 문화예술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영업을 떠나 그들의 편의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이 칼럼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당시 울산문화예술 운동의 정점에 있던 인물이었고 명다방 역시 마땅히 갈 곳 없는 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울산문화예술인들에게 이상숙 시인은 잊힐 수 없는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최 시인은 칼럼 끝머리에서 오영수, 천재동, 이시우 등 울산출신 예술인들이 울산에 들러서 친지는 만나지 못하고 가더라도 이상숙 선생만큼은 꼭 만나고 갔다는 일화까지 소개했다. 그는 후덕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의 시비는 중학 시절 제자였던 시인 양명학 울산대 명예교수가 건립위원장을 맡아 2017년 10월 중구 복산동 송골공원에 세워졌다.  

명다방 앞길에서 바라본 옛 울산소방서 방향. 작가 제공
명다방 앞길에서 바라본 옛 울산소방서 방향. 작가 제공
텅빈 거리 그래도 점포는 때가 되면 문을 연다. 작가 제공
텅빈 거리 그래도 점포는 때가 되면 문을 연다. 작가 제공

시계탑 중심 당시 최고 번화가 자리

명다방 주변은 다방들이 많았다. 동헌 길을 따라 과거 중부경찰서가 있을 당시는 경찰서 정문 맞은편에 수경다방, 북정동 우체국 앞에는 물레방아다방 등이 있었고 동아약국 사거리 건너편에는 천지다방, 우정동 방향 2층에는 고궁다방이 있었다. 이외에도 명다방 주변에는 여러 다방이 있었다. 그중 명다방이 규모가 가장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다방은 교실 두 개를 합친 것만큼 제법 널찍했다. 

명다방에서 구 천도극장 쪽으로는 구 울산중부소방서, 구 울산중구보건소, 구 조흥은행(신한은행) 등의 각종 기관이 즐비했다. 시내버스가 통행하는 1번 도로는 울산 남성들을 상대로 모모양복점, 국정사가 아직 건재하다. 그리고 최근 삼산 남구문화원 건너편으로 이전한 일번가 양복점이 있었고 뒷 도로 즉 구 상업은행이 있었던 길은 지금도 여성 의류 판매장이 간간이 보이지만 과거는 논노패션 등 울산의 상류 여성들을 위한 의상점들이 즐비했다. 남구 공업탑, 시청 주변, 월평 로터리 고속버스 터미널 일대 등의 논밭이 울산의 신흥택지로 개발되기 이전만 해도 명다방 일대는 시계탑을 중심으로 울산 최고 번화가로 명성을 날렸다. 

넉넉한 공간·저렴한 비용 일일찻집 명소로

명다방은 교직에 계셨던 이상숙이라는 시인이개업하면서 얻은 명성으로 구시가지에서 인기 다방 축에 들었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연말이면 어김없이 일일찻집 단골 명소였다. 몇 달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최소한 명다방에서 일일찻집은 불가능했다. 우선 공간이 넉넉했고 임대비용도 상대적으로 시계탑 주변 음악 다방에 비해 저렴했다. 

장발의 헤어칼라에 청바지를 입고 명다방에서 알루미늄 쟁반을 들고 엽차와 커피를 날랐던 친구들도 지금은 모두 직장에서 정년퇴직했다. 울산불교청년회를 창립했고 신도회와 청년회 간에 가교역할을 맡았던 오태룡(76·2023년 기준)형은 명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후배들과 불교 청년운동을 펼쳤던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들이었다고 회상한다. 

시 낭송·사진·서예  등 전시회도 풍성

최초로 명다방을 찾았던 시기는 1978년 가을쯤이었다. 그때부터 명다방에 줄을 대고 다녔다. 그러나 나는 이상숙 시인을 직접 뵌 적은 없다. 이미 이상숙 시인이 서울로 간 이후였다. 

그 시절, 가을은 시작부터 시 낭송과 시화전, 사진전, 서예전 등이 줄을 이었다. 

1980년대 어느 가을밤 기억이다. 문인들이 들락거리면서 가끔은 빛바랜 시집이 탁자 위에 놓여있기도 했던 이 다방에서 시낭송회가 열렸다. 울산지역 기업들의 독서대학 학생들이 중심이 됐다. 1980년대는 정부의 정책적 지원으로 규모가 큰 기업들에 독서대학 설립이 붐을 이루었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 이름, 단발머리 아가씨가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를 낭송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이미 다방 분위기는 시심(詩心)에 흠뻑 젖었다. 더 말해 무엇 하랴 가을밤 우수수 낙엽 지는 거리풍경과 더불어 참가자들이 모두 감성으로 들떴다. 가을 분위기와 어울렸던 그 아가씨 이름이 오래오래 입에 많이도 오르내렸다. 지금 어디에서 훌륭한 문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그로부터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커피 자동판매기 등장 이후 다방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명다방도 그중 한곳이었다. 한동안 빈 상태로 있다가 2013년 3월 사단법인 천사운동 울산본부가 입주했다. 한때 커피 내기 화투를 치다가 삐쳐서 화투판을 뒤엎어놓고 나가버렸던 손님을 붙잡는다고 마담과 레지가 뛰어나가다 엽차를 쏟기도 했던 출입구 계단에 낯선 전등 불빛이 환했다. 이제는 문화와 예술운동이 아닌 또 다른 사회 봉사활동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음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해남사 길목 불자들의 아지트

명다방은 북정동 해남사 길목에 있어서 불자(佛子)들 단골 모임 장소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매주 수요일 저녁 중구 북정동 해남사에서 수요 법회를 마친 울산불교청년회 회원들이 늦은 시간이라도 어김없이 출근부 도장을 찍었다. 울불청 회원들이 부서별 모임을 대부분 이곳에서 했다. 그 바람에 자연스레 청년 불자(佛子)들 다방처럼 됐다. 가끔은 조계종 울산불교 신도회 어른들을 뵐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시절, 명다방은 길거리를 떠돌며 들은 전설을 주워 담는 속 깊은 봉지였다. 그래서 명다방에 가면 울산 돌아가는 소문은 대략 들을 수 있었다.

약 40년 전쯤, 해남사 법회를 마치고 삼삼오오 명다방으로 몰려가던 그 시절이 오늘따라 무척 그립다. 잊지 못할 명다방의 추억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이제는 사회봉사 활동 공간으로

이런저런 추억을 들추며 명다방 주변을 몇 번 돌았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돌았을 때였다. 지나쳐도 보이지 않던 낡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농협에서 동헌으로 가는 길, 퇴락한 건물들, 빛바랜 페인트칠 모습이 시골 장날 분칠한 할머니를 만난 듯 정겹다. 농협 옆에 부스럼딱지처럼 붙어있는 구두 수리 센터와 함께 공방들도 옛 모습 그대로다. 

이들은 남구가 떴거나 말거나 여기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 거리 대부분 건물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낡았다. 깨져서 때우고 바람에 날아갈까 헌 타이어로 눌러놓은 슬레이트 지붕들이 다닥다닥 이마를 맞대고 있다. 그곳에는 문화인쇄사도 있고 연화공방도 있다. 호산필 '죽림칠현' 간판을 단 문필방도 이 거리의 주인이다. 이 업소들은 구시가지의 역사가 되고 전설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세상이 부동산 개발붐으로 들썩이는데도 아직 이 골목만큼은 과거 흔적들이 많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근래 들어 식당이 한 곳, 두 곳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들 몰려들던 그시절 추억속으로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명다방 시절은 울산이 굴기하던 시절이다. 1962년 공단 선포식이 있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몰려들던 시기는 1970년대가 시작되면서 공장들이 어느 정도 가동하고 있을 때부터다. 청춘들을 상대하는 술집과 음악다방들이 도심에 문을 열기 시작하면서 울산은 상전벽해의 도시가 된 것이다. 

한때 전국에서 공기가 가장 나빴던 도시였고 물가가 또 가장 비쌌던 도시로 알려졌던 울산은 광역시 승격 이후 대한민국 산업을 이끄는 산업 수도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인구가 갈수록 줄고 있다니 문제가 심각하다.  울산으로 청춘들이 몰려들고 다방마다 청춘들이 넘쳐나던 그 시절을 오늘날 벤치마킹할 수는 없을까 생각한다.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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