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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장세련
삽화. ⓒ장세련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던 이선달이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숨소리가 제법 거칠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칼춤만 추고 있을 텐가?"

 노각수가 빙긋 웃기까지 하며 농 비슷하게 말을 던졌다. 이선달은 놀리는  듯한 상대의 말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체면치레하다가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비굴하게라도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한 것이다. 의리나 명분을 앞세워 목숨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 덕분에 계유년의 정난에도 살아남은 이선달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목숨을 내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오늘 대결은 이것으로 끝을 냈으면 싶은데 어떻소? 날이 저물었는데 밤에도 계속 칼춤을 출거요?"

 이선달은 끙 하는 신음을 내뱉었다. 노각수의 말이 비위에 상했지만, 그의 말대로 밤새도록 칼만 휘두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좋소이다. 그런데 털보는 어찌할거요? 그에게 대장 자리를 도로 물려주도록 하시오."

 "그렇게 하리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그럼 당장 여기 산채를 떠나가시겠소?"

 "그건 곤란하지요. 나도 지금 갈 곳이 마땅찮은 몸이요. 이곳 마구령과 저쪽 고치령도 다스려야 하니 고치령에 털보를 보내도록 하겠소. 이곳 규칙은 예전 방식을 그대로 따르도록 하겠소."

 "그럼 됐소이다. 우린 이만 대남 주막거리로 내려가겠소. 물론 오늘 통행세는 한 푼도 없는 걸로 하겠소."

 "그렇게 하시구려."

 이선달과 노각수는 금방 마음을 맞추었다. 조금 전에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신이 난 것은 털보였다. 마구령과 고치령은 지척 간에 있는 고갯길이라 번갈아 가며 관리를 했었다. 부석장이 아니면 마구령은 사실 필요가 없는 고갯길이었다. 고치령은 영월에서 순흥으로 바로 가는 빠른 길이었다. 장꾼들은 부석장을 거쳐야 했기에 대부분 마구령을 넘어 다녔다. 

 산꾼들에게는 고치령보다 마구령이 수입이 짭짤했다. 털보는 안 그래도 고치령과 마구령을 각자 책임지는 부하를 한 명씩 세우려던 참이었다. 자신 위에 노각수가 군림한다고 해도 이선달이 있으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털보만큼 기분이 좋은 것은 장꾼들이었다. 오늘 통행세가 없다 하니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얼른 주막거리로 내려가 진탕 마시고 싶은 생각에 설레었다. 통행세로  바치는 인삼 한 근 값이면 밤늦도록 술을 들이켤 수도 있었다. 잘만 하면 색시 젖무덤을 주물럭거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흥이 났다. 이 모든 게 이선달의 덕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장꾼들은 서둘러 짐을 지고 자리를 떴다. 마당 한편에 방치되어 있는 시신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장꾼들과 같이 방물 보따리를 짊어지고 자리에서 일어난 이선달은 마당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시체를 거적으로 덮어놓은 곳이었다. 이선달이 그리로 걸어가자 노각수가 뒤따라갔다.  

 "이건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이거요? 아, 이 오라 지을 양반이 사람 비위를 확 뒤집어놓지 뭡니까.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조카를 쫓아내고 그 자리에 앉은 자를 난 놈이라고 하면 되겠소?"

 "그래도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 놓으면 어쩌란 말이오. 시신이라도 가족에게 넘겨주어야 하지 않겠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소. 순흥 사람이라고 하는데 연락은 해놓았소. 시신을 거두러 곧 유족들이 올라올 것이오."

 이선달은 한 번 더 거적을 들추어 시신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사람을 떡판에 올려놓고 떡메로 내려쳐도 이렇게 얼굴이 훼손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새삼 노각수의 주먹 힘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어떻게 이 지경으로 만들 수가 있소. 형씨 주먹으로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오?"

 노각수는 이선달의 물음에 왼 손바닥으로 오른손 주먹을 슬슬 쓰다듬으며 빙긋이 웃었다.

 "내 주먹으로 돌도 부수었는데 그깟 대갈통을 부수는 일이 무슨 대수겠소." 

 이선달은 사람의 머리를 무슨 물건에 빗대는 노각수의 말에 치가 떨렸다.

 "살인이 일어났다고 하면 순흥부에서 가만두지는 않을 텐데요."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함길도에서 관군과 싸워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소."

 "그렇다면 계유년에 이징옥 장군의 휘하에 있었던 것이오?"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허허, 이것 참."

 이선달은 하늘이 사람을 보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인 걸 보면 천벌을 받을 놈인데,  지금 당장 필요한 사람이 노각수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다. 김태환 작가

 (월·수·금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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