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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왕생이
삽화. ⓒ왕생이

가을이 저문다 싶더니 한파주의경보가 뉴스의 중심에 있다. 기상이변이 이렇게 우리들의 삶을 피곤하게 만든다. 날이 추우니 당연히 거리에서 들어갈 곳을 찾아야 하는데 골목마다 커피점들뿐이다. 그냥 엽차 한잔 마시고 속을 덥힌 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다방은 없다. 그래서 다방 시절을 기억하는 7080 청춘들에게 편지 한 통을 쓴다. 제목은 '떠나가 버린 옛님께 바침'이다. 나의 그 시절 일기일지도 모른다. 

암울했던 시절 보석 같았던 그곳

1978년 1월 청운의 꿈을 안고 울산에 왔습니다. 당시 울산은 여기저기 빈 땅에 공장이 지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자고 나면 새로운 공장 건물이 봄날 대밭의 죽순처럼 솟아났습니다. 공돌이라 불리기도 했던 우리는 매일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쨍하고 해 뜰 날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송대관의 이 노래는 청춘들에게 미래 희망을 꿈꾸게 했었습니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모진 격동의 시대를 용케 살은 당신, 그때를 잊지는 않았겠지요.

 기름쟁이하고는 사귈 수 없다며 한마디 말도 없이 어느 날 떠나 버린 여자친구를 원망도 했었지요. 여자친구가 떠나버린 날, 사 홉들이 소주 한 병을 쥐포 한 마리 구워놓고 숙소에서 밤새워 다 비웠던 그 쓰라린 심정도 지금은 웃음으로 훌쩍 넘기는 나이가 됐습니다.

 1970년대 후반, 청자다방에 갔다가 얼굴이 동그란 그 여자친구를 만나서 너무 기뻐했던 당신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중략) 

 각설하고 머리숱이 희끗희끗 백발인 지금에도 그 시절 알딸딸한 추억 속에 청자다방도 고스란히 남아있으리라 생각합니다. 1980년대로 이어지면서 수시로 긴급조치 몇 호가 발령됐고, 종말에는 위수령도 발령됐었지요. 청춘들은 갈 곳을 잃었습니다. 유일한 돌파구가 음악다방에서 유신헌법 타령하던 청춘들의 골 아픈 시대를 건너뛰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저녁 아홉 시 TV 종합뉴스 상당 부분이 대학생들 데모 영상이었지요. 생업위기를 호소하는 상인들의 굳은 표정 인터뷰가 양념처럼 우리들의 시선을 끌기도 했었습니다. 대학가 주변은 대학생들과 경찰이 대치하면서 벽돌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졌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지금 그 시절 대학생들이 정치하고 있는데 나라는 여전히 시끄럽습니다. 

 오늘은 옛날식 다방에 앉아 333 커피 한 잔 하면서 오래전, 그 시절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하늘이 우중충한 게 내일은 눈이 내릴 것 같습니다. 오늘 편지는 이만 여기서 접습니다.

간판이 철거된 바로 아래 2층에 자리했던 청자다방.(2021년) 작가 제공
간판이 철거된 바로 아래 2층에 자리했던 청자다방.(2021년) 작가 제공

세상은 온통 잿빛 하늘이었지

1980년대는 뉴스마다 희뿌연 최루탄 가스가 도심을 뒤덮는 것을 거의 매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를 시청하는 국민들도 '그러려니' 하고 또 무덤덤했다. 경찰차들이 도로를 질주하고 있는 영상들과 수시로 긴급조치 제 몇 호가 발령됐다는 자막을 보고도 무덤덤했다. 

 청춘들의 가슴은 늘 잿빛 하늘같이 우중충했고 경찰은 청춘들의 화를 돋우기라도 하듯 '풍속규제에 관한 법률 위반'이라는 다소 긴 법을 적용,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에 열을 올렸다. 단속하거나 말거나 이를 비웃듯 아가씨들은 기를 쓰고 무릎 위 30㎝를 넘긴 미니스커트를 입었고 나팔바지 청년들은 귀를 덮는 히피 스타일 장발을 유행시켰다. 그 유행의 정점에는 음악다방 DJ 오빠가 있었다. 

 암울했던 시절, 음악다방들은 청춘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잘 살지만, 정신적으로는 최루탄 가스가 난무했던 그 시절이 더 넉넉했다고 할 수도 있다. 

 격동의 시대를 치열하게 산 7080 청춘들은 그때 그 음악다방들을 어떻게 기억하게 하고 있을까. 그 궁금증의 중심에 청자다방이 있다. 7080 기억 속에 박힌 보석 같은 청자다방을 끄집어내 본다. 

 양은냄비처럼 찌그러진 청춘들의 아픔을 보듬고 달래준 것은 청자다방을 비롯한 음악다방이었다. 공단 도시 울산의 청춘들이 청자다방으로 몰려들었던 것도 그들의 서럽고 아린 상처를 보듬어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싶다. 시대적 아픔을 나눈 청춘들의 사랑과 아픔이 함께 머물렀던 공간이 청자다방이다. 묵은 책장에서 먼지투성이인 사진첩을 꺼내듯 조심스레 청자다방을 들추었다.

 

7080 청춘들 대중문화의 산실

울산에서 청자다방을 모르면 간첩 소리를 듣던 시절이 있었다. 청자다방이 음악다방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기는 변방 울산이 공업 도시로 굴기하던 1970년대와 80년대였다. 청자다방은 구 상업은행 맞은편 음악 감상실 '무아'보다 더 알려졌던 울산 대중문화 산실이었다. 

 지금도 7080 청춘들은 청자다방 이야기를 하면 관심을 가진다. 이 다방은 시계탑에서 울산교로 나가는 일명 울산 명동거리, 현재 성남동 뉴코아 아울렛 맞은편 D 생활용품매장 2층에 있었다. 그러나 이미 허물어진 성벽처럼 청자다방 옛터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 2021년 8월이 끝나갈 무렵 생각 속 청자다방 흔적을 찾으러 갔으나 여기가 저긴지, 저기가 여긴지 도무지 헷갈렸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40년 전 다방들을 떠올리며 시계탑 일대를 중심으로 옥교동과 성남동에 있었던 원도심 다방지도를 그려보았다. 그 지도를 들고 다시 시계탑 거리로 나섰다. 몇 번 실수를 거듭한 끝에 겨우 청자다방 위치를 찾았다. 

 청자다방을 찾으러 간 날의 이야기부터 먼저 해야겠다. 

 시계탑에서부터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자를 재듯이 한 걸음, 두 걸음 옮겨가면서 주변을 확인했다. 시계탑을 물고 주리원 백화점 방향 코너 지하에는 돌체다방이 있었다. 1층에는 후배 형이 운영하는 칠성제화가 있었고, 전 영의 '어디쯤 가고 있을까'를 흥얼 그리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과거 주리원백화점(현, 뉴코아 아울렛) 옥외매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맞은편 건물이 기억과 일치하는 청자다방 건물임이 분명했다. 2층 추녀 마감재가 그때도 대리석이었다. 아직도 과거 흔적이 남아있었다. 건물은 낡았어도 명품 옷을 입은 듯 귀티가 났다.

 아슴푸레한 기억 속에 자리한 청자다방, 그간 업종이 여러 번 바뀌어서 지금은 다방이었을 당시의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당시는 가장 높은 번화가 3층 건물이어서 높이만으로도 당당히 이름값을 했다. 주변 상가들이 헌 타이어로 슬레이트나 양철지붕을 누른 블록을 쌓은 하꼬방(판잣집) 1층 건물들이 즐비하던 시절, 그래서 청자다방은 더욱 빛이 났다.

 1970년대 중, 후반기 고등학생이었던 홍대식은 고3 때 가끔 방위병이라면서 사복을 입고 청자다방을 들락거렸다고 기억했다. 웃음이 나지만 다방이 청소년들 출입금지구역이던 시절 이야기다. 

멀리 시계탑이 보이는 청자다방 앞길.(2021년) 작가 제공
멀리 시계탑이 보이는 청자다방 앞길.(2021년) 작가 제공

이 다방 인기 스타는 단연 'DJ 이과수 씨'

음악다방 얼굴마담은 누가 뭐래도 DJ였다. 유리창 너머 뮤직 박스 속의 DJ들은 왜 그리도 멋졌던지. 그 시절 젊은이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DJ를 꿈꾸기도 했다. 

 7080 시절 청자 다방은 자타가 인정하는 3명의 인기 DJ가 교대로 출연하고 있었다. 오래전 고인이 된 DJ 이과수 씨도 청자다방이 명성을 얻는데 이름을 올렸다. 수년 전 복고풍 대중음악이 다시 뜨면서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등 쎄시봉 출신들이 방송가를 휩쓸었던 적이 있다. 지금도 이들은 쎄시봉 출신이라는 나름의 음악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이에 덧대서 울산 쎄시봉 같은 요람이 청자다방이었다고 하면 누가 시비를 걸까. 울산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이끌었던 곳, 첫 번째가 청자 다방이었다. 

 이과수 씨 등 울산 유명 DJ들이 번갈아 출연한 청자다방은 방송국 못지않은 음악프로그램으로 유명했다. '정오의 희망곡'을 비롯해 '2시에 만납시다' '한밤의 DJ 쇼' 등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열광적 팬들이 있다. '2시에 만납시다'를 진행하는 시간대는 평일에도 홀에 들어가지 못한 청춘들이 다방 계단까지 줄을 이었다. 

 1시간은 대기 줄에 서야 하는 치열한 자리 경쟁을 치르고 삼삼오오 청자다방에 자리를 차지한 청춘들은 뮤직 박스 안 'DJ 이과수'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냥 껌뻑 뒤로 넘어갔다. 천상의 목소리로 신청한 음악을 소개해 줄 때는 숨소리까지 가슴에 담을 정도였다. 품격 높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음악에 취해 보통 몇 시간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요즘 말로 멍 때리는 시간이었다. 청자다방에서는 보컬 그룹의 록 음악이 나오면 마치 자신이 리드 싱어가 된 듯 노래를 따라 부르며 몸으로 장단을 맞추었다.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이런 풍경은 지난 70년대를 거쳐 80년대 중반까지 시계탑을 중심으로 사방 200여m 안에 자리했던 '음악다방'들 대부분이 그렇다고 보면 된다. 

 다방 실내는 늘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탁자에는 엽차잔과 함께 노래 신청용 메모지, 추억의 돈표 성냥갑이 놓였었다. 심심한 청춘들은 성냥개비를 동개동개 포개서 모아 매미 집을 짓거나 그냥 '뚝뚝' 분지르면서 무료한 시간을 축냈다.

 아가씨를 기다리던 총각은 나타나지 않은 그녀를 원망하며 속이 숯덩이가 돼서 "어이, 레지 엽차 한 잔 더" 했고 눈초리가 샐쭉하게 올라간 레지 아가씨가 엽차 잔을 들고 와서는 탁자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무안 주듯이 "커피는 안 시키능교" 했던 시절, 그 꿈 많았던 청춘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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