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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장세련
삽화. ⓒ장세련

이선달은 소운을 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착잡한 마음을 위로하는 뜻이었다. 그런 다음 머슴살이하고 있는 옛 서방과 살림을 새로 시작하면 어떤가 물어보았다. 한참을 생각하던 소운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안 될 말입니다. 이 몸은 이미 여염집 여인이 되기에는 더러워진 몸입니다. 아무리 머슴살이를 한다 한들 이런 더러운 계집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제가 못 견딜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일이 너 혼자 잘못이 아니지 않느냐. 부모가 아무리 그런다고 제 식구를 내친 죄가 있지 않느냐."

 소운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음이 착잡한 것 같았다. 이선달이 잡은 손 하나를 빼내어 자신의 아랫배를 슬슬 문질렀다. 배 안에 자라고 있는 아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어차피 그 남자는 아이가 없을 몸인 것 같으니 오히려 잘되지 않았느냐."

 "하지만 그 사람도 저도 숟가락 하나도 없는 처지인데 어떻게 살림을 차릴 수 있겠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아라. 둘이 마음만 맞는다면 내가 산 넘어 순흥에 기거할 집은 알아보도록 하마."

 이선달의 제안에 소운은 감격에 겨워 흐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다음 장에 영월에 가면 바로 임서방을 데려오도록 하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거라."

 "네, 오라버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은혜는 무슨. 두 사람이 잘살면 되지 않겠느냐."

 이선달은 늦은 점심을 마치고 서둘러 마구령 고갯길로 올랐다. 소운은 고갯길을 한참 따라오다가 힘에 부쳐 멈추어 섰다.

 "이제 돌아가거라."

 이선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휑하니 언덕길을 올라갔다. 소운은 이선달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마구령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노각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선달이 올라오는 걸 멀리에서 살펴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넘어갈 때는 졸개들을 데리고 가더니 올 때는 홀몸이구나. 산 사람들이 버글버글하는 고개를 혼자서 넘다니 간이 크긴 큰가 보구나."

 "허허. 제깟 간이 커봐야 배 안에 있지 얼마나 크려고. 승냥이 새끼처럼 장꾼들 넘어오길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는가 보오."

 "뭐라? 승냥이 새끼라고?"

 "억울하면 승냥이 새끼보다는 좀 낫게 살아보시오."

 "허허허. 이런 육시할 놈의 장꾼을 봤나.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먼저 겨루던 걸 끝내야 하지 않겠소?"

 "좋소. 산채 마당으로 갑시다."

 이선달은 노각수가 이끄는 대로 산채로 따라갔다. 산채마당이 가까워지자 힘찬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마당에 도착하자 이선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마당에는 산 사람들 모두가 열을 맞추어 무술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앞에서 연습을 지휘하는 사람은 전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얼굴이었다.

 "저자는 누구요? 처음 보는 화상인데."

 "허허. 말을 가려서 하시오. 저 사람은 조선에서는 칼 솜씨가 제일 좋다는 이승균이란 자요. 칼로 맞붙어서 세 합을 넘긴 자가 없다는 검객이오."

 "그렇다면 저자와 겨루어봐야겠구려."

 노각수가 이선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도대체 목숨이 몇 개나 되길래 말을 함부로 내뱉나 하는 표정이었다. 노각수가 마당에 나타나자 지휘를 하던 이승균이라는 자가 소리를 질렀다.

 "모두 동작 그만. 앞으로 모여라."

 이승균의 지시에 산꾼들은 일사불란하게 앞으로 모여들었다. 좌와 우의 열을 똑바로 맞추어 서니 본데없는 산적들이 아니라 어느 세도가 집안의 사병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갑자기 군사훈련을 시작한 것이오?"

 "어제 순흥부의 군사들이 여길 쳐들어왔었소. 이젠 우리도 맞설 힘을 길러야 하지 않겠소?"

 "순흥부의 군사들이요?"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아무도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다치지는 않았지만, 우리 사람 하나를 붙들어갔소. 그리고 산에서 캐 놓은 산삼이랑 귀한 약재들을 모조리 털어갔소."

 "누굴 붙들어 갔단 말이오?"

 이선달은 모여선 산꾼들을 휘 둘러보았다. 눈에 익은 얼굴이 보이지는 않는지 훑어본 것이었다. 그러나 털보를 빼고는 딱히 누가 잡혀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털보 대장이 보이지 않는구려."

 "털보는 고치령에 가 있고 김장복이라는 군사가 잡혀갔소."

 노각수는 산꾼들을 군사라고 호칭했다. 이선달은 노각수가 아무래도 어디선가 관에 소속되었던 자로 보였다. 이선달이 무리를 주욱 훑어보니 정말 김장복이란 자가 보이지 않았다. 산 사람들 사이에 연장이 크기로 허구한 날 놀림을 받던 사내였다.   

 그런데 순흥부 군사들이 왔으면 산 사람들이 많이 다쳤을 텐데 모두 멀쩡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김장복이 혼자 잡혀간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김태환 작가 (월·수·금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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