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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왕생이
삽화. ⓒ왕생이

매일 발디딜틈 없이 관객들 몰리던 태화극장
극장과 다방은 가까이 있을수록 서로 득이 되는 악어와 악어새 같은 관계였다. 유명연예인 쇼와 다양한 지역 문화행사가 열렸던 태화극장과 천도극장 이야기를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울산은 1962년 시 승격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공단지역이 돼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서일교라는 사람이 장인 고기업 씨에게 권유한 것이 영화 사업이었다. 

해방 후 서 씨 집안은 대구에서 영화관을 운영해 재미를 봤다. 따라서 서 씨는 울산에 근로자들이 많아지면 영화 사업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이 사업을 권유했다.

1992년 태화극장, 맥심다방에서 내려다보면 영화관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2021년 인터넷 스크랩
1992년 태화극장, 맥심다방에서 내려다보면 영화관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2021년 인터넷 스크랩

맞은편 위치해 관람객 대기장소로 인산인해
고기업 씨는 1964년에 태화극장을, 그리고 1968년에는 천도극장을 차례로 개관했다. 서 씨의 예언대로 영화 사업은 대 히트였다. 

당시만 해도 오락이라고는 없던 시절 근로자들이 매일 밤 영화관으로 몰려들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갈데없는 막일꾼들까지 영화관으로 모여들었다. 설과 추석에는 근로자들이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쇼를 공연할 때는 인산인해를 이뤄 정원의 3~4배가 넘는 관객들을 입장시켜 돈을 끌었다.(출처: 울산의 극장들)

사전에 예매해야 영화를 볼 수 있을 만큼 극장은 성황을 이뤘다. 그때는 새벽손님을 붙잡기 위해 조조할인 등이 유행했다. 중·고등학생들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시험을 치르고 단체관람을 하는 날 극장 주변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극장 골목은 모든 업종에서 장사가 잘됐다. 

청자다방 유명 DJ 교차출연도 인기몰이 한몫
특히 맥심다방은 맞은편 태화극장 손님들을 상대하는 장사였다. 음악다방으로 문을 연 맥심다방은 서로 간판이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의 청자다방과 함께 청춘들로 매일 문전성시를 이뤘다. 오전 10시 다방 문을 여는데 미리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로 다방 계단은 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 청자다방 유명 DJ가 맥심다방에 교차 출연했던 것도 청춘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였다. 

도도한 청자다방 DJ가 맥심다방에 출연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다방 품격이 높았다는 이야기다. 그 시절은 유명 DJ들은 시간대별로 시내 음악다방을 순례하듯 옮겨 다녔다. 

청자다방에서 맥심다방으로 이동하는 DJ를 따라 40~50명이 우르르 몰려가는 군상들을 상상해 보라, 1980년대는 도심에서 DJ를 따라 다방을 옮겨 다니는 젊은이들의 진풍경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요즘 각종 행사장에 출연한 트로트 가수를 따라다니는 광 팬들의 집단 움직임과 거의 같다고 보면 된다. 아니면 운동선수들의 경기가 끝나고 이들이 타고 가는 버스 주변에서 한 번 더 얼굴을 보기 위해 기다리며 괴성을 지르는 극성팬들을 상상하면 아등바등하다.

맥심다방 건물 뒤로 통하는 골목, 이 골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이 그저 한적하다. (2013년) 작가 제공
맥심다방 건물 뒤로 통하는 골목, 이 골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이 그저 한적하다. (2013년) 작가 제공

DJ 동선따라 젊은이들도 '우르르' 팬문화 원조
코로나19로 인해 사람 만나기 어려운 시기가 거의 3년간 계속됐다. 코로나 19는 2019년 11월,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처음으로 발생해 보고된 새로운 유형의 변종 코로나바이러스로 급성 호흡기 전염병이다. 이 전염병이 유행하던 거의 3년간 사람들은 만남을 거부해야 했다. 이 인간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도로를 지나다 보면 유명 커피점 앞에 차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드라이브스루라고 한다. 차를 타고 커피를 사서 간다는 이색풍경이 지금은 낯설지 않지만, 초기에는 참 어색했다. 

1980년대를 전후한 그 시절 휴일 음악다방들의 계단에 긴 대기행렬이 자주 생겼다. 코로나 시절 커피점 앞에 줄을 서 있는 자동차들처럼 음악다방에 들어가지 못한 청춘들이 길게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렸다. 그때가 낭만과 젊음이 어우러졌던 시절이었다. 

아는 사람 만났을 때 먼저 나가는 이가 계산
태화극장 맞은편 맥심다방은 어중간한 시간에 도착한 영화 관객들의 대기 장소였다. 다음 영화 상영시간을 맞추려는 사람들의 기다림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이 다방 창가 자리는 저만치서 걸어오는 친구의 발걸음 소리를 가슴으로 들을 수 있었다. 맥심만이 줄 수 있는 팁이었다. 

또 하나, 다방 창가 자리는 극장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만 같이 봐도 이상한 소문이 나돌던 시절, 아는 누구누구가 어떤 누구를 만났다는 소문이 이곳에서 시작됐다고 보면 정답이다. 이런 소문으로 홍역을 치렀던 유부남 형들과 유부녀 누나들이 내 주변에도 제법 있었다. 

지하에 경양식집 고인돌이 있었던 맥심다방은 음악다방 수준으로만 치면 인근 청자다방에 뒤지지 않았다. 전통에서만 약간 밀렸다. DJ들도 청자다방이나 이 다방이나 같았다. 맥심다방이 전성시대였을 때 미스터 정, 홍00, 이석 등의 유명 DJ들이 울산 음악다방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어두컴컴한 뮤직 박스 조명, 푸른색으로 반쯤 가려진 유리창 넘어 세계는 가슴 뛰는 아가씨들에게 판타지아 바로 그것이었다.

태화극장 맞은편 2층 맥심다방이 있었던 건물. 외국계 프랜차이즈 업체가 입주해 있다. (2013년) 작가 제공
태화극장 맞은편 2층 맥심다방이 있었던 건물. 외국계 프랜차이즈 업체가 입주해 있다. (2013년) 작가 제공

온종일 다방 죽치는 껌딱지들 피하다 해프닝도
그 시절, 음악다방에서 뜨는 노래는 방송국 인기가요 순위에 곧바로 올랐다. 음악다방 존재가치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음악다방은 온종일 죽치는 껌딱지 청춘들도 있었다. 그때는 사회 통념상 식당이나 다방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먼저 나가는 사람이 커피값을 대신 내주는 것이 불문율 같은 미덕이었다. 양심을 전당포에 맡긴 껌딱지 청춘들은 안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아는 체를 해서 커피 값을 벌었다. 노골적 껌딱지들을 만나지 않기 위해 딴 곳에 눈길을 두고 자리를 찾아가다가 다른 손님 테이블 엽차를 쏟아 세탁비를 물어야 하는,낭패를 당하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유행처럼 번진 장발
대중문화의 중심에 DJ들이 있었다. 그들의 몸짓과 손짓은 바로 유행병처럼 번졌다. DJ가 장발의 머리카락을 튕기듯 쓸어 올리는 손짓이 젊은이들 사이에 바로 유행하면서 너도나도 장발을 선호했다. 이와 반대로 직장에서는 단정한 머리 스타일을 원했다. 

1980년대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경비들과 총무팀들이 정문에서 장발을 단속했다. 

근무시간에도 현장을 돌던 총무부장이 안전모 사이로 비집고 나온 머리숱을 잡아당겼고 그 자리에서 가위로 머리숱을 자르는 진풍경도 벌어졌었다. 

어떤 친구는 정문 통과를 위해 손바닥에 침을 묻혀서 머리숱을 다림질하듯 바짝 붙였다. 직장에서 안전사고 우려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라는 장발을 죽어보자고 했던 시절이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이다. 

대중문화 시발점이자 종점이었던 음악다방
그러나 음악다방은 1980년대 중순 즈음, 대마초 사범 단속에 DJ들이 대거 걸려들면서 퇴폐문화온상으로 낙인됐고 이때부터 전국적 현상으로 서서히 음악다방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 월성다방이 먼저 간판을 내렸고 그로부터 불과 몇 년 사이에 울산지역 음악다방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음악다방들이 문을 닫으면서 청바지를 즐겨 입었던 청춘들도 갑자기 갈 곳을 잃었다.

1980년대 초는 바야흐로 대중문화가 방향타를 잃어버린 시기였다. 도심은 긴급조치 발동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크게 줄어들었다. 청춘들은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일을 조심해야 했다.

80년 초중반 사회 혼란 속 하나둘 간판 내려
맥심다방이 언제 문을 닫았는지는 기록이 없다. 다방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이다. 점쳐지는 것은 1990년대 후반 문을 닫지 않았을까 한다. 1980년대 초반 다른 음악다방들이 대마초 등으로 된서리를 당할 때도 이 다방은 굳건히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태화극장이 있어서 맥심다방이 다른 다방에 비해 더 오래 문을 열었을 것 같다는 것은 단순한 짐작이다. 

이 다방을 단골로 드나들었던 청춘들은 1990년대까지 맥심다방에서 커피를 마셨던 기억이 있다고 한다. 이들의 증언을 믿는다.

정은영 불교문인협회장
정은영 불교문인협회장

"90년대까지 맥심다방서 커피" 단골들 증언
한 시대 대중문화 산실 역할을 했던 음악다방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온다. 뮤직 박스에서 보드라운 가죽 수건으로 엘피판을 닦고 있던 장발의 DJ 모습이 그려진다. 그렇게 7080 청춘들의 젊은 날은 초겨울 낙엽 따라가듯 가버렸다. 문화라는 것은 늘 시대를 따라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리라. 

1982년 이용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잊혀진 계절'이다. 이 노래가 처음 나왔을 때 무지무지 불렀던 기억이 난다. 애인에게 편지 쓸 때도 이 노래 한 구절은 꼭 챙겼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기고

다방 열전을 쓴다고 했더니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그때 그 시절 음악다방은 화목난로 같은 따뜻한 공간이었다고. 맥심다방 역시 가슴 시렸던 청춘들에게는 그런 공간 아니었을까.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정은영 불교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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