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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왕생이
삽화. ⓒ왕생이

 

시작하면서

7080 청춘들의 아지트였던 다방을 거리에서 찾기가 점차 힘들어진 세상이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커피 전문점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과 비례해 다방은 역방향으로 고속질주 중이다. 그래서 그런지 길을 가다 다방 간판을 만나면 기분이 좋다. 흡사 모래밭에서 잃어버린 동전을 찾은 느낌이다. 

 어느 외국인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발달하게 된 것은 다방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모습들이 그들에게는 진지한 토론을 하는 것으로 비쳤을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다방을 잊어버리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더불어 7080 청춘들의 추억도 함께 사라져가고 있다. 직장에서 정년을 맞은 베이비붐 세대들에게 다방이 사라진다는 것은 대들보 같은 삶의 축이 무너지는 것과 다름이 없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새마을 노래가 매일 아침 청소차에서부터 시작하던 시절, 대한민국 국민은 열심히 살았다. 쉬는 날도 없었다. 잔업과 특근이 입에 붙었다. 연장근무를 하느라 회사에서 밤을 지새우기 예사였던 시절, 다방은 이들에게 대표적 문화휴식 공간이었다. 

 엉덩이가 빠져드는 푹신한 의자에 박히듯 앉아서 애인의 이름을 낙서하던 청춘들이 속칭 베이비붐 세대다. 이들은 유명 커피점에서 마시는 아메리칸 스타일 커피보다 커피 셋, 프리마 셋, 설탕 셋 하면 통했던 다방 커피 맛을 잊지 못한다. 

 레지 아가씨의 샐쭉한 웃음도 이제는 빛바랜 앨범 속의 사진처럼 잃어버린 향수가 됐다. 다방이 사라짐과 더불어 마담과 레지라는 단어도 생소해져 가는 세상이다. 

 

종로다방 시절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그 길에서 꿈을 꾸며 걸어가리라
을지로에는 감나무를 심어보자
감이 익을 무렵 사랑도 익어 가리라

 1982년 2월 발표된 가수 이용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서울'이라는 노래다. 다방 이야기를 쓰면서 늘 느끼는 것 중 하나가 이용이라는 가수에 대한 것이다. 다방을 말할 때 한 곡 챙겨보면 십중팔구 그가 부른 노래다. 아마도 커피와 어울리는 감성적 노랫말이라서 그런가 보다. 

 울산은 시계탑을 중심으로 한 원도심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 거리를 빗대 울산 인사동거리라고 부른다. 종로다방은 동헌에서 구 천도극장과 소방서 방향으로 걷다가 7번 국도 코너 동아약국을 지나 조흥은행(현 신한은행)을 지나서 바로 옆 건물 지하에 있었다. 건너편에 인재 치과가 있어서 옛터를 찾기가 한결 수월했다.

 이 다방은 2024년 1월 기준, 약 14년 전에도 찾아왔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얼마나 변했을까, 아뿔싸! 이 다방은 그때와 변함없이 그대로 있다. 다만 먼지가 더 쌓인 채였다. 새로 주인이 바뀌지도 않았던가 보다. 그때와 다른 것은 다방으로 내려서는 지하 계단 입구가 굵직한 쇠줄로 막혀있었다. 

 

종로다방 간판.
종로다방 간판.

 

 1990년대 들면서 울산 상권 중심이 남구 공업탑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이후 원도심은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병·의원이 문을 닫고 구 상업은행 일대 7번 도로 여성 패션점들이 몰락했다. 종로다방도 변화를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어느 날 소리소문없이 문을 닫고는 그대로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추고 말았다. 

 피가 끓던 청춘들이 분기탱천하는 젊음을 커피 한잔에 타서 마셨던 종로다방은 얼추 20년 전에 문을 닫았다. 잠시 문을 닫았다가 다시 문을 열 줄 알았다. 야속한 세월은 고속열차를 타고 질주하듯 앞만 보고 내달렸다. 누구도 세월이 이만큼 빨리 가버릴 줄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나도 이 다방 외상 장부에 이름을 올리고 단골로 드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레지 아가씨에게 커피 한잔 사주었던 시절이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았다. 

 자주 이 다방을 들락거린 것은 K 신문 기자로 있을 때 지사사무실이 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 마감을 앞두고는 종로다방에 커피를 배달시켰다. 이 다방은 언론사 모 선배가 마담과 잘 아는 사이였다. 우리는 그 선배가 없는 시간대만 골라서 갔다. 마담을 옆에 앉히고 거드름을 피우며 커피를 마시다가 갑작스레 들이닥친 선배한테 들켜서 도망갔던 기억도 어제일 같이 생생하다. 그 시절 다방을 들락거렸던 선배들은 이미 가시고 없다. 14년 전 다방열전을 쓴다고 찾았을 때 기록했던 내용 일부를 옮겨 적는다. 

 

내려가는 벽에 아직도 '종로 커피'라고 쓰여 있다. 옛날에는 종로다방이었는데 아마 유행을 따랐던 것 같다. 계단을 끝까지 내려갔다. 다방 입구에 이르자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지하 다방 내부는 적막했고 어두웠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공간에서 서늘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그냥 다방 문 앞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기억은 과거를 향해 달렸다. 그 시절 급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종로다방은 폐업한 이후 여태 빈 곳으로 남아있다. 
 '기다리다 간다.' 누군가 입구 벽에 남겨놓은 비뚤비뚤한 흔적만이 아직도 옛 추억의 인두 자국처럼 남아있다. 

 

 서울이나 울산이나 종로는 그 도시의 중심이었다. 종로다방이라 이름 지었던 것도 서울 유명세를 울산으로 옮겨온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종로다방은 마담의 영업력이 돋보였던 다방으로 단골들은 기억하고 있다. 

 배달이 다방매출을 올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던 시절, 종로다방은 주변 점포들의 단골이었다. 그때는 점포나 일반 사무실에서 손님이 오면 잠시 기다리라 해놓고 무조건 다방에 커피를 시켰다. 커피를 직접 타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품격을 낮추는 일이라 생각했다. 손님도 다방에서 커피를 배달시켜줘야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미니스커트에 가슴이 깊게 팬 블라우스를 입은 레지가 쟁반에 커피를 담아 한 손에 쥐고 또 한 손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아찔하게 질주하는 모습들이 흔했다. 종로다방에도 레지가 4~5명이 있었다는 것은 커피 배달이 다방매출을 올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었다는 것과 맥이 통한다. 

 조흥은행(현 신한은행) 지나서 동헌 가는 길목 코너, 동아약국장님도 이 다방을 기억하고 있었다. 약국에 들르면 궁금해하는 이 거리 역사를 한마디씩 바둑판에 포석을 깔 듯 들려주셨다. 안타깝게도 이 골목의 역사를 훤히 기억하고 계셨던 약국장님도 2021년 10월 돌아가셨다. 이제는 어디 물어볼 때가 없어져 버렸다. 모두가 장구한 세월을 엽차 잔 비우듯 흔적들만 남기고 매일 매일 떠나가고 있다. 

 울산 예총 서진길 고문은 "이 거리 역사하면 동아약국장님이다. 그분이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은 울산 원도심 백과사전 한 권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것과 다름없다"라고 아쉬워했다. 서 고문은 "동아약국 건너편에 울산 원도심에서 가장 오래된 신천지 다방이 있었고 소방서와 보건소 옆에는 향촌다방이 있었지만 없어진 지가 수십 년이 지났다. 향촌다방에서 커피 한잔하던 시절 이야기가 아른하다"라며 웃으셨다. 

 

지하로 내려가면 종로다방이다. 문을 닫은 지금은 이정표 없는 거리.
지하로 내려가면 종로다방이다. 문을 닫은 지금은 이정표 없는 거리.

 

원도심 번성과 쇠락

원도심 역사를 알고 있는 또 한 분이 있다. 경주가 고향인 김종수 선생이시다. 그는 1954년 울산에 왔다. 그래서 울산 번영을 지켜본 사람 가운데 한사람이다. "다방이 잘 된 시기는 청춘들이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서 몰려오던 1970년대부터였다. 그때는 지금의 커피 전문점보다 다방이 더 많았을 것이다. 시계탑을 중심으로 근방에는 지하와 2층 대부분이 다방이었다"라며 그때를 회고했다.   

 1970년대 들면서 울산 옥교동과 성남동은 하루가 다르게 번화가로 변모했다. 당시 도심 기준은 시계탑에서 멀어질수록 변두리에 속했다. 종로다방은 시계탑에서 우정동 방향으로 오다 동헌으로 꺾어지는 첫 골목 들머리여서 도심권이었다. 특히 조흥은행이라는 대형금융기관이 있다는 것도 다방영업에 큰 보탬이 됐다.

 서진길 고문이 펴낸 '울산 100년'이라는 사진집에 보면 시계탑은 사거리에서 울산교 방향으로 나가는 곳에 아치형으로 서 있다. 아치 위에 시계가 붙어있어서 시계탑이라고 불렀다. 원조 시계탑은 어느 날 사라졌고 그냥 말로만 시계탑거리라고 불렀다. 중구청이 문화의 거리를 만들면서 사거리 중심에 시계탑을 복원했다. 그러다가 복원된 시계탑을 좀 더 업그레이드해서 만든 것이 요즘 보고 어쩌다가 볼 수 있는 지붕 위 미니 기차 형태다. 한 시간마다 미니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한 바퀴를 운행하는 신식이다. 그러나 수시로 고장이 나는 바람에 요즘에도 시간마다 돌아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제는 모두가 새롭게 변했다. 다방을 중심으로 사람 냄새가 났던 질펀한 추억들도 사라져버렸다. 원도심에 변화가 진행될수록 남아야 할 추억의 흔적들은 사라지고 있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한숨이 나오지만 하는 수가 없다.

 

주변 풍경을 그리다

종로다방은 주변에 남성 양복점, 은행이나 병·의원들이 많았다. 종로다방에서 구 소방서 방향으로 나오다 만나는 시계탑 방향 큰 도로변은 남성복 맞춤 집들이 즐비했다. 50년 전통의 모모라사를 비롯해 국정사, 이상현 테일러 등이 지금도 남아서 울산 신사들의 옷을 맞춤하고 있다. 이들 양복점은 그 시절 라디오 광고까지 했던 명품 남성복점들이었다. 그중 일번가 양복점만이 현재 남구 문화원 사거리로 이전했을 뿐이다. 

 국정사 사장님은 "그때는 누구나 맞춤해서 입는 시절이었다. 부산에서 디자이너로 있다가 울산 국정사로 와서 지금은 대표로 있다"라며 "양복점들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것은 울산 남성의 5%는 여전히 양복점 맞춤옷을 입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양복점 사장님들에게도 다방은 잊지 못할 추억의 공간이었다. 양복점에 손님이 오면 무조건 커피를 배달시켰다. 그중 가까이 있는 종로다방은 이 양복점들이 매출을 올려주는 대단한 고객들이었다. 휴대전화기는커녕 삐삐도 없던 시절, 다방은 삶의 중심이었다. 

 7080 청춘들 삶의 중심에 알 박기 하듯 다방이 존재했던 시절이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라고 보면 된다. 필자가 기자 시절 취재원을 만나는 기본적인 일부터 휴식공간으로서 일 없는 청춘들이 죽쳤던 다방은 모든 역할에 충실했다. 새콤달콤한 기억 하나는 가끔 무료할 때 다방 내실에서 점심 내기 화투판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아마 다방 내실에서 점심 내기 고스톱을 쳤다면 분명 그는 그 다방 단골임이 확실하다.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동헌 옆 지금의 시립미술관은 과거 울산중부경찰서였다. 그 시절 경찰서 출입 기자를 하면서 종로다방 외상 장부에 번듯하게 이름을 올렸다. 다방 외상 장부에 이름을 올리고 나서 친구들을 불러서 커피를 샀다. 우쭐대기 위해서였다. 외상 장부는 내가 좀 잘 나간다는 사실을 알리는 신호탄 역할이기도 했다. 

 아마 그때부터 단골 대우를 받았던 것 같다. 단골에 대한 예우로 우선 달라지는 것은 눈치 보지 않고 모닝커피가 가능했다. 한마디로 품격이 높아졌다. 하지만 단골로서 치러야 하는 대가도 만만찮았다. 우선 레지들에게 사주는 커피 값도 무시할 수가 없다. 나이가 누나 벌인 레지들이 미소 지으며 "오빠, 커피 한잔한다"하고는 허락도 없이 매출용으로 반 잔도 안 되는 커피를 가져와서는 홀짝 마시고 장부에 사인하라고 하던 때도 있었다. 그때는 속이 부글거렸지만 눈 질끈 감고 사인을 했다. 직업상 마담이나 레지들과 친해 놓으면 울산 돌아가는 사정을 손금 본 듯이 알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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