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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왕생이<br>
삽화. ⓒ왕생이

시작하면서

2022년 1월 27일은 울산공업센터 지정 60주년 공식 기념일이다. 울산은 1962년 대한민국 최초 특정 공업센터로 지정된 이후 이 나라 경제부흥을 이끌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1월 27일 오전 10시 30분 울산전시컨벤션센터에서 '울산공업센터지정 6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울산으로서는 감개무량한 행사이지만 공업센터지정 50주년 역사를 축하했던 10년 전 행사보다는 규모가 많이 축소됐다. 100년을 반으로 접은 50년 단위보다는 의미가 크지 않다고 보는 것 같다. 미래 100주년 기념식을 기대해야 하는데 그때 필자의 나이를 생각하면 참으로 까마득하다.

 그나마 의미 있는 60주년 축하 행사들을 챙겨보면 지난 1월 28일 오후 8시 울산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울산시가 주최한 공업센터 지정 60주년 기념 '앙코르! 울산 1962' 신년음악회가 개최됐다. 

 또 울산박물관은 울산 측정공업센터 지정 고시일인 지난 1월 27일부터 6월26일까지 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울산 산업 60년, 대한민국을 이끌다'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다. 

 그리고 울산 남구는 장생포 문화창고 2층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기념관'에서 공업센터 조성 이후 산업수도로 성장한 울산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게 지난 2월 3일부터 4월 30일까지 고래문화재단 주최로 '한국발전의 시작, 울산에서 찾다'라는 특별전을 개최했다. 2월 3일은 기공식 즉 폭죽을 터뜨린 날이다. 

 울산은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선두에서 이끌었다는 자부심이 강한 도시다. 울산이 공업센터로 지정되고 나서 최소한 산업으로만 치면 천지개벽한 도시가 됐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제격이다. 여천동 일대 배 밭이 사라지고 석유화학공업단지로 조성됐다. 방어진 바닷가 한적한 곳에 현대조선소, 염포만 갈대밭에 현대자동차가 건설됐다. 

 공단지정 이후 전국에서 청춘들이 매일매일 울산으로 몰려들었다. 그 바람에 이들이 거주할 셋방도 턱없이 부족했다. 소를 키우던 마구간이 개조돼 쪽방으로 만들어졌던 시절도 있었다. 어떤 집은 이런 쪽방이 13개나 됐다. 아침 출근길이면 학성공원 버스정류장에 수백 미터 줄이 만들어졌다.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 

 신바람이 절로 나는, 젊음이 살아 숨 쉬는 희망의 도시가 울산이었다. 덩달아 1970년대와 80년대, 울산은 근로자들을 상대하는 주점과 다방들이 거리마다 진풍경이었다. 덩달아서 아침마다 생수를 배달하는 레지 아가씨들의 오토바이 소음도 거리를 가득 메웠다. 

 그 시절은 주점과 다방들이 사람 사는 세상 중심에 있었다. 그중 새벽부터 영업하는 다방들이 세상 문화의 중심에 있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사업하는 사람들 사이에 돈 없이는 살아도 다방 마담과 등지고는 살 수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당시 다방 마담 말발은 힘이 있었다. 한번 마담 입에 오르내리면 사업은 성공과 거리가 멀었다. 지금도 그 시절을 치열하게 살았던 7080 청춘들을 만나 다방 이야기를 꺼내면 대부분 점잔을 빼면서도 피식피식 웃는다. 나름 얽히고설킨 다방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 시절,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다방이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다방은 늘 점잔을 빼는 사람들에게 터부시 당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울산공업센터지정 60주년 특별전에 울산의 다방 이야기가 빠진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다. 최소한 오래 비어있는 공업탑 로터리 원 다방이라도 잠시 문을 열고 사람 냄새 물씬한 시화전이나 추억의 사진전이라도 했었다면 공업센터지정 60주년 축하 행사는 문화 예술적으로 더욱 빛이 났을 것 같다.    

지난 2022년 1월 27일 울산전시컨벤션센터에서 울산공업센터지정 6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br>
지난 2022년 1월 27일 울산전시컨벤션센터에서 울산공업센터지정 6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어떤 이야기

한비다방을 말하기에 앞서 대한민국 경제개발 전초기지로 출발했던 울산의 산업화 과정 이야기 가운데서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한비)와 관련한 비화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 이 다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다.

 현재 울산시 남구 여천동 롯데정밀화학은 롯데그룹계열의 화학 전문기업이다. 1964년 8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비료의 자급화를 위해 설립한 한국비료공업(주)이 모체이다. 

 1962년 시행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은 국가기간산업의 촉진이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비료산업이었다. 열악했던 식량 사정을 개선하려면 식량 생산력을 높여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비료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당시 한국에는 비료공장이 없어 전량 수입해야 했다. 이에 식량 자급화 계획의 하나로 비료공장을 잇달아 건설했고 그중 울산에 세웠던 제5공장이 한국비료공업(주)이었다. 

 그러나 공장을 완공할 무렵인 1966년, 사카린의 원료를 건설 자재로 위장해 들여오다가 부산 세관에 적발된 '한국비료공업의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 여파로 한국비료공업(주) 주식 51%를 산업은행이 인수하는 형태로 국가에 헌납됐다. 

 그 후, 공기업 형태로 운영돼오던 한국비료공업(주)은 1994년 민영화 방침에 따라 매각대상이 되었고 공개입찰을 통해 삼성그룹에 최종 낙찰되면서 국가 헌납 27년 만에 삼성그룹이 재인수했다. 상호를 삼성정밀화학(주)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2015년 롯데케미칼에 인수됨으로써 롯데정밀화학(주)으로 변경되었다는 것이 이 기업과 관련한 이야기다.

해바라기 커피잔과 알루미늄 쟁반, 그리고 설탕컵이 정겹다.<br>
해바라기 커피잔과 알루미늄 쟁반, 그리고 설탕컵이 정겹다.

한비다방

산업도시 울산에서 회사 이름을 딴 다방이 흔치 않다.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 현중다방이 없고 현대자동차 앞에도 현자다방이 없다. 그러나 유일하게 기업 이름을 딴 다방이 있다. 

 한국비료공업(주)을 줄인 한비다방이다. 이 다방은 한국비료공업(주)이 삼성정밀화학을 거쳐 롯데정밀화학으로 이름표를 거듭 바꾸었는데도 여전히 한비다방 그대로다. 계절 감각에 무딘 개나리가 늦가을에 피듯이 말이다.

 중구 홈플러스 앞 복산(한비) 사거리에서 병영 방향으로 가다 오른쪽 첫 번째 소방도로를 물고 있는 수정빌라 반지하 공간이 '한비다방'이다. 

 좀 더 설명하자면 이 다방은 약 40년 전, 한국비료공장 사택 정문이 있었던 중구 약사동 들머리 수정빌라 반지하에 다방이 생기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상호를 바꾸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는 의지의 다방이다. 

 아직도 다방은 연륜이 묻어나는 개업 당시 액자들이 그대로 걸려 있다. 마담, 아니 주인에게 언제 개업했느냐고 물었더니 잘 모른다고 했다. 

 현재 주인은 “다른 사람이 먼저 하고 있던 다방을 1989년 10월 사업자 등록증만 변경해서 영업하고 있다"라고 했다. 그 세월이 벌써 올해로 36년이다. 

 

그리운 추억 속으로 

1976년 6월 한국비료공업(주)에 입사한 우진석씨(74)는 한비에서 시작해 삼성정밀화학으로 바뀌고 난 2009년 정년퇴직했다. 그는 한비시절 이야기를 묻자 “청춘을 바친 직장이었다. 사장님이 거주하는 1호 사택이 중구청 앞 울산 신광교회 자리에 있었다. 사장부터 사원 대부분이 사택에 거주했다. 전국 어디를 가도 울산 한비에 다닌다고 하면 부러워했을 정도였다"라고 그때를 추억했다.  

 한비 작업복을 입고 학성공원 일대 주점에 가면 한비 작업복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외상을 주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잘나가던 기업이 한국비료였다. 

 그가 기억하는 한비사택 규모는 7만5천여 평이다. 대략 울산고등학교 뒤 서한 이다음 아파트에서 시작해서 중구 홈플러스, 중구청 앞을 지나 약사초등 일대 대단지 아파트 전부를 포함하는 터였다. 숲속에 5층 아파트 6동이 있었고 나머지는 139세대 단독주택단지였다. 

 무룡초등과 학성여고 등이 당시는 사택 운동장이었다. 봄과 가을이면 이 운동장에서 사원 체육대회가 열렸고 인기가수 초청 공연도 수시로 개최됐다. 행사를 마친 직원들이 뒤풀이로 자연스레 한비다방에 들러서 커피를 마시거나 뒤풀이 겸해서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 낭만을 노래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시내에서 동료들과 한잔하고 흥에 취해 노래를 부르며 울산고 앞을 지나 복산동 계비고개에 올라서면 바로 한비사택 아파트가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지금이야 고층아파트가 즐비한 세상이지만 그때는 5층 아파트가 대단한 고층이었다. 사는 사람이 많다 보니 주변 상가들에도 한비 식당, 한비 방앗간, 한비 이발관 등이 생겼다. 다방 역시 당연히 '한비'라는 간판을 달 수밖에 없었다.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다방도 물장사에 속한다. 그래서 커피만 파는 게 아니라 저녁 시간이면 위스키도 팔았다. 퇴근 후 주점 아니면 다방에 가는 것이 시대적 문화풍토였던 그 시절, 시계탑 주변 음악다방들이 청춘들을 끌어들였지만, 외곽 변두리 다방들은 나름 살아남는 방법으로 도라지 위스키 등을 단골 중심으로 팔면서 장사가 제법 짭짤했다. 

 특히 언양, 범서, 방어진, 덕하 등 변두리 다방 마담들은 밤 9시가 지나면 은근히 '티' 즉 도라지 위스키를 찾는 단골들을 기다렸다. 그때 유행했던 말이 “따불 티" 또는 “티 따불"이었다. 즉 도라지 위스키 두 잔이라는 말이다. 마담도 한잔, 나도 한잔이 기본이었다.  따불 티를 한잔하러 가는 청춘들은 신바람이 났었다. 마담과 단둘이 속닥거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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